이전 글에 썼던 데로 올해에는 매월 세 편 가량의 영화를 기록해두려고 한다. 항상 그렇지만 최고의 세 편을 뽑으려는 건 결코 아니고 그보다는 어떤 식으로든 인상에 남는 작품이라고 말하는 게 좋겠다. 


   

[추적 (The Chase, 1966; 아서 펜)] (리전프리 Powerhouse Films 블루레이로 감상)

한 죄수의 탈옥과 귀향으로 인해 벌어지는 어느 남부 마을의 단 하룻밤의 이야기. 수많은 갈등과 모순이 누적되어 언제 폭발해도 이상하지 않은 이 끈적끈적한 마을의 구성원들이 이 사건에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그려낸다. 

영화의 주인공은 눅진한 열기(熱氣)다. 빠져나갈 곳 없는 밀폐된 공간에 가득 차 서서히 그 온도와 압력이 증가하고 있는, 갈 곳 없이 방황하는 에너지로의 열기이다. 이 힘은 일단 출구를 발견하자 금요일 밤의 일탈에 들뜬 마을 사람들을 홀리며 관객까지 질식시킬 기세로 꿈틀거리며 나아간다. 야생 동물 같은 열기는 불쾌하지만 매혹적이며 마치 뒤이어 다가올 뉴 할리우드를 예고하는 듯하다. 나에게 '미국'을 담아내는 영화라면 이런 거다. 

다양한 등장인물의 속사정을 구구절절 다루는 데는 관심이 없지만 그 인물들이 모여 관계를 맺음으로써 이루는 총체로의 세계가 흥미롭다는 점에서 [그랑 프리 (Grand Prix, 1966; 존 프랑켄 하이머)]와 [총알을 물어라 (Bite the Bullet, 1975; 리처드 브룩스)]를 닮은 영화. 나는 이런 영화들이 사랑스럽다. 


 

[야간 학교 (Night School, 1981; 켄 휴즈)] (리전A Warner Archive 블루레이로 감상: 대문자 자막. 대사 누락 있음.)

첫 살인 장면을 보자마자 "이건 지알로잖아!"라고 외쳤다. 훌륭한 지알로 영화들이 그러하듯 살인 행위 자체가 아니라 살인이 벌어지기 전까지의 긴장감을 팽팽히 유지하는 데 힘을 쏟는 영화이며 그 긴장감을 만드는데 살인이 벌어지는 공간들의 특수성과 관객의 터부를 자극하는 연출이 효과적으로 쓰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살인마가 가죽 재킷에 오토바이 헬멧을 쓰고 면도칼 대신 쿠크리 나이프를 든 채로 희생자들을 위협하는 걸 즐긴다면 말 다 했다.

극 중 살인마는 항상 희생자들의 머리를 잘라 물(연못이든 물이 담긴 버킷이든)에 넣어두는데, 살인마의 습성에 대해 무지한 인물이 이미 살인이 벌어진 공간에서 태평하게 할 일을 하며 머리가 담겨 있을지 모르는 액체 용기들 사이를 누비는 장면에서는 혀를 내두르게 된다. 살인마의 설정을 만들어 두었으면 이를 영민하게 이용하는 데다가, 살인 하나를 낭비하지 않고 살인이 벌어지기 전뿐 아니라 벌어진 후의 정황까지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관객을 긴장감으로 괴롭혀주겠다는 자세에야 호감을 품지 않을 수 없다.


 

[99번 수감 구역의 싸움 (Brawl in Cell Block 99, 2017; S. 크레익 잘러)]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로 감상)

복역 중인 주인공 브래들리 토마스가 모종의 이유로 다른 죄수를 죽여야 한다는 내용의 영화가 132분이라는 건 좋지 않은 신호다. 더구나 정작 그가 감옥에 가는 것이 영화가 시작하고 40분도 지나서라면? 어이쿠.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시라. 브래들리가 왜 갇혔는지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건 영리한 선택은 아니지만, 과거지사를 구구절절 설명하기보다 브래들리가 다른 사람들을 대하고 제안이나 돌발 상황에 반응하는 태도를 보여주는데 쓰이고 있다. 덤으로 영화의 가장 인기 있는 장면 중 하나도 시작 10분 만에 나온다. 분을 이기지 못한 브래들리가 차 한 대를 분해하듯 부분부분 박살 내는 시퀀스인데 이 장면을 위해 어떻게 차를 부수어야 배우가 다치지 않을지 최대한 연구를 한 뒤 배우 빈스 본이 실제로 맨주먹으로 차를 박살 냈다고 하면 영화의 태도가 조금은 짐작이 가리라.

이렇게 많은 시간을 들여 브래들리의 캐릭터를 구축했으니 수감된 이후로는 거침이 없다. 일반 교도소에서 목표물이 있는 최고 보안등급 교도소까지 이감되어 가는 과정이 엄청난 속도로 전개되며 많은 인물이 짤막한 등장 후 사라지지만 이미 확고하게 중심을 잡고 있는 브래들리와의 관계 맺음을 통해 나름의 캐릭터 성을 구축한다. 구렁텅이로 떨어지면서 감옥의 풍경에서는 점차 현실성이 사라지고 [씬시티 (Sin City, 2005; 로버트 로드리게스)]에나 나올 법한 교도소가 등장하지만, 이 전이조차 무리가 없다. 감독의 전작 [본 토마호크 (Bone Tomahawk, 2015)]와 달리 관객들을 폭력의 무방비한 피해자가 아니라 복수에 나서는 집행자 브래들리와 같은 편에 둔다는 점은 (그 위험성이야 알지만) 한결 마음에 드는 태도다. 그래도 노파심에 경고, 모든 이를 위한 영화는 절대로 아니다. 



2017년 결산은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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