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카펜터와 샌디 킹 부부가 제작한 TV용 옴니버스 공포 영화 [시체 가방 (Body Bags, 1993)]을 이번 주의 영화로 꼽는다. 액자가 되는 간단한 이야기를 빼면 총 세 편의 이야기가 있는데 첫 번째 단편 "주유소"와 두 번째 단편 "머리카락"을 카펜터가 감독했으며 세 번째 단편 "눈"은 [텍사스 전기톱 대학살 (The Texas Chain Saw Massacre, 1974)]의 토비 후퍼가 감독했다. 굳이 나눠서 평가를 해보자면 "주유소"는 가장 잘 만든 작품이며 "머리카락"은 가장 정이 가는 작품, "눈"은 가장 반가운 작품이랄까. 음, 마크 해밀이 스테이시 키치보다 반갑다고 하기도 좀 어려운데... 

이 영화가 카펜터의 최고 작품들에 뒤지지 않는 걸작이라는 주장을 하려는 건 아니다. 다만 카펜터의 영화 감독으로의 진가가 잘 드러나는 작품이라 느꼈다. 이유는 단순하다. 나는 카펜터의 연출가로의 독보적인 장점으로 두 가지를 꼽고 싶은데, 제한된 공간에서의 액션/서스펜스 연출과 개성적인 인물을 짧은 시간에 빚어내는 능력이다. [시체 가방]에서는 각 에피소드가 30분가량으로 제한된 탓도 있어 두번째 장점이 특히 빛을 발한다. 많은 공포 영화들이 최대한 짧게 인물 묘사를 끝내고 공포 장면으로 넘어가기 위해 인물에 몇 가지 전형적인 속성을 부여하거나 이를 뒤집는 식으로 인물의 특징을 빠르고 손쉽게 관객에게 알리려 드는데 이런 시도는 대개 관객을 인물에서 유리시키고 인물의 운명에 심드렁해지는 결과를 낳는다. 인물이 살아 있는 실체가 아닌 일단 주입된 키워드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반면 카펜터의 인물들은 액션/리액션에 의해 스스로가 누구인지를 규정하고 설명한다. 여기에 카펜터의 강점이 있다. '최대한 짧게 인물 묘사를 끝내고 공포 장면으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공포 장면 자체가 인물 묘사를 겸하기 때문에 지극히 경제적이며, 공포 장면에서 인물들은 뻔하게 비명 지르며 도망가다 살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독특한 반응을 보이고 최선이라 생각하는 행동을 수행하기 때문에 관객으로서는 그 결과가 궁금하기도 하고 상투적이지 않은 상황에 긴장도 하게 되어 몰입감의 측면에서도 효과적이다. 

예를 들어 "주유소"의 주인공 앤은 24시간 영업 주유소에 심야 점원으로 첫 근무를 하게 된 여성이다. 그런데 별다른 설명 없이 그녀가 근무를 시작하자 심리학 서적을 꺼내 놓고 공부하는 것을 보여주는데 이를 통해 그녀가 학생이며 지루한 근무 시간을 공부를 하며 보낼 만큼 성실하고 또 그런 상황에서 열악한 심야 근무를 할 정도로 재정적인 상황이 좋지 않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후 그녀는 다양한 손님을 만나는데 개성적인 그들을 향해 그녀가 보이는 제각기 다른 반응이나 표정을 놓침 없이 담아낸다. 서서히 그녀가 어떤 사람에게 호감을 품는지, 문제가 생겼을 때는 어떤 식으로 해결을 모색하는지, 어떤 종류의 사건에 가장 겁을 먹는지를 이해하게 되며, 그에 따라 관객은 자연스럽게 그녀가 주유소에서의 첫 근무를 무사히 마치게 되길 원하고 그녀가 살아남기를 응원한다. 

너무 카펜터 이야기만 한 거 같으니 다른 이야기도 잠깐 해볼까. 스테이시 키치가 탈모에 대한 편집증적인 공포에 사로잡힌 "머리카락"의 주인공을 연기하는 건 뭐랄까... 너무 자연스러워서 웃었다. [비대한 도시 (Fat City, 1972; 존 휴스턴)]나 [닥 (Doc, 1971; 프랭크 페리)]를 봤을 때부터 탈모가 심히 걱정되는 외모였기에. 심지어 부가 영상으로 실린 인터뷰에서 키치 또한 탈모에 대해 평생 의식해왔음을 고백한다. 그런 만큼 배우 본인도 아주 신이 나서 이 우스꽝스러운 배역을 연기하는 게 눈에 보이는데 키치의 팬이라면 정말 즐겁게 웃을 수 있는 단편이다.

토비 후퍼의 "눈"은 가장 정석적인 공포 영화이긴 한데, 아무래도 어디로 튈지 모르는 카펜터의 단편들보다는 비교적 무난하여 재미가 덜했다. 루크 스카이워커 이외의 배역으로 나오면 언제나 반가운 마크 해밀의 연기가 볼거리랄까. 

아참, 키치는 인터뷰에서 카펜터의 연기 지도가 마치 존 휴스턴의 그것을 떠올린다고 스쳐 지나가듯 말하는데 무척이나 반가웠다. 

아참2, "주유소"는 앞서 언급한 카펜터의 또 다른 장점 '제한된 공간에서의 서스펜스'도 죽여주는 작품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