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영화보다 네 번째 영화가 먼저인 이유. 어제부터 오늘 낮까지 좀 바빠서 글을 쓸 여유가 없었다. 밀린 일들을 처리하고 영화 한 편 본 다음에 글을 쓰려고 했는데 그만 그 영화가 [The Ninth Configuration (1980; 윌리엄 피터 블래티)]였기 때문에 다른 영화에 대한 글을 쓸 수가 없고, 그래서 그냥 이번 주 영화를 미리 골라 버렸다. 어차피 이번 주말에 또 바쁠 거라 사실 이번에는 예전에 공언한 쉬어가는 주로 삼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는데 뭐 어때. 게다가 이번 주에 이 영화보다 훌륭한 영화를 볼 수는 있겠지만 이 이상 인상적인 영화를 보기란 굉장히 어려울 거란 확신이 있다. 

베트남 전쟁 말기에 미군이 이상 행태를 보이는 병사들을 한 고성에 수용하고 그들이 실제로 정신병을 앓고 있는지, 그렇다면 어떻게 치료하는지를 연구하는 시설에 심리학자 케인 대령(스테이시 키치)이 책임자로 부임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코믹 공포 스릴러 같은 걸 기대하고 봤는데 웬걸, 전혀 안 웃기고 하나도 안 무섭다. 스릴은 막판에 좀 있긴 하다. 그런 영화가 아니라 답하기 어려운 형이상학적인 질문들에 대한 답을, 한 인물의 사례를 통해 탐구해보려는, 현대판 성서 같은 영화였다. 근데 이렇게 뭉클하고 묵직해도 되는 건가? 

사실 전반부는 조금 산만했다. 애초에 주인공 케인 대령이 타인의 행위에 거의 반응을 보이지 않는 사람이라 시설의 수용자들이 한 명씩 등장하여 케인 대령과 면담하는 부분까지는 좀 지루했다. 그런데도 호감을 품을 수 있었던 건 영화 시작부터 그 자태를 뽐내는 숨 막히게 아름다운 고성의 버드아이뷰샷 (외관은 독일의 엘츠 성에서 촬영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에 뒤지지 않는 실내 미장센 덕분이었다. 

그런데 전반부가 지나가고 조금씩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케인 대령이 어떤 사람인지 이해하게 되는 순간 영화에 대한 몰입도가 달라졌다. 이야기의 큰 줄기를 예측하기 어렵지 않음에도 깊은 감동을 얻게 되는 건 무엇보다 스테이시 키치의 극도로 절제된 연기 때문이다. 아마 다른 배우가 연기했다면 지나치게 작위/피상적이라는 인상을 받거나 정반대로 통속적이라 여겼을 법한데, 키치는 그 중간에서 절묘하게 케인 대령을 양쪽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설득력 있는 인물로 납득시킨다. 키치 찬양만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이 그런데 어쩌겠나. 영화의 진심에 호소하는 전략이 제대로 먹혀들어 관객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키는 것은 그의 공이 크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망했을 영화를 키치 혼자의 힘으로 끌고 간다는 건 전혀 아니다. 각본도 촬영도 다른 배우들의 연기도 탄탄한 좋은 영화다. 다만 앞서 말했지만 이 영화는 케인 대령의 고뇌와 선택에 주목하기 때문에, 이 모든 요소가 키치를 뒷받침하는 방식으로 작용하고 있으며, 연기를 한답시고 온갖 난리 치는 일 없이 우아할 정도의 자제된 동작만으로 이를 한 몸으로 받아내는 키치의 역량에 탄복했기 때문에 그를 중심으로 언급한 것이다. 

성급하지만 올해의 배우로 이미 스테이시 키치를 뽑고 싶은데 과연 이 설레발은 연말까지 유효할 것인가?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