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에는 스테이시 키치의 연기에 압도되어 그에 집중한 글을 남겼는데 오늘 차분히 생각해보니 잘못 말한 부분도 있어 영화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하고 싶다. 

먼저, '하나도 안 웃기다'는 발언은 심각히 잘못되었는데, 영화의 전반부는 상당히 웃기다. 그런데 이 전반부의 내용이란 것이 새로 부임한 케인 대령이 수용자들을 한 명씩 면담하면서 중구난방인 그들의 발언을 차분히 들어주는 것이 대부분이라 나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좀 난감한 기분이 들었기에 신나게 웃지 못했던 것 같다. 그리고 케인 대령은 항상 상황을 매우 진지하게 대하기 때문에 우스꽝스러운 장면에서도 웃음이 쉽게 나오지 않기도 하고. 다시 본다면 어떨지 궁금하다. 그리고 개그의 상당수가 고전 영화, 공포 영화를 인용하는 방식이라 영화애호가들은 더 좋아할 듯. (그런데 애초에 자발적으로 이 영화를 찾아볼 정도면 상당한 수준의 영화애호가겠지.) 

다음으로 영화의 모든 요소가 스테이시 키치의 연기를 뒷받침하는 식이라는 발언도 철회. 예를 들어 이 영화의 실내 디자인은 해머 영화나 로저 코먼의 에드거 앨런 포 영화를 연상케 하며, 베트남 전쟁 말기의 미군 환자들을 수용한 고성이라는 이상한 설정을 최대한 살려내는 멋진 디자인인데 이걸 격하시킬 이유가 없다. 이 영화에서 케인 대령 다음으로 중요한 인물인, 발사 전날 미쳐서 수용된 전직 우주비행사 컷쇼 대위를 연기하는 스콧 윌슨은 또 어떤가. 그의 과장되고 격정적인 연기가 없었다면 키치의 절제된 연기가 이토록 효과적이지는 않았을지 모른다. 가끔 등장하는 괴상한 꿈/환상 장면은 (키치의 연기와 무관하게) 형언할 수 없이 기괴한데 동시에 숨 막히게 아름답다. 

돌이켜 볼수록 대단한 각본이라는 생각이 든다. 전반부의 환자 제각각의 이야기가 무척 산만하게 느껴진다는 말은 이미 했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니 그 이야기들은 전혀 산만하지 않았다. 되려 영화의 흐름을 잃지 않으면서도, 케인 대령과 컷쇼 사이의 '믿음'에 관한 문제에만 빠져들지 않고 (만약 그랬다면 이토록 멋진 영화가 아니었겠지) 영화에 풍요로움과 여지를 더하고 다양한 층위로 볼 여지를 만들어낸다. 

대사의 비중이 큰 영화라 만약 영어를 더 잘 이해하거나 한글 자막이 있었다면 좋았을 거란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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