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이번 주의 영화로 위스컨신 필름 페스티벌에서 본 강간복수극 [복수 (Revenge, 2017; Coralie Fargeat)]을 꼽는다. 

(예고편에 신체 훼손 장면이 적나라하게 등장하니 주의하시길) 


강간복수극 영화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진다. 전반부에서는 가해자들이 피해자 여성을 폭력을 행사하고 강간하며 후반부에서는 피해자 여성 혹은 그녀의 대리자가 가해자들을 징벌한다. 양쪽 파트는 자신만의 문제를 품고 있다. 전반부의 경우 카메라의 시선을 어떻게 설정하는가에 따라 방조와 관음의 혐의를 지우기 어려우며 정도가 심하면 포르노와 구분하기 어려운 영화도 있다. 전반부를 비교적 잘 넘긴 영화들조차 후반부에서 문제가 생기곤 하는데 남성 대리자가 복수를 성취하는 경우, 복수를 하는 여성마저도 착취적이고 관음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경우 등 강간복수극은 그 자체로 온갖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물론 문제 있는 영화들이 눈여겨볼 가치가 없다는 뜻은 아니지만, 영화 속 여성의 위치에 대한 논의가 더 활발해진 현대에 이르러 새로운 강간복수극을 만든다고 하면 의구심부터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복수]는 가해자들의 학대를 보여주는데 많은 시간을 쏟지 않는다. 강간 장면도 대놓고 카메라에 비추지 않고, 남성이 무력한 여성을 상대로 직접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장면 또한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이렇게 말하면 자연히 한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강간복수극의 전반부에 문제의 소지가 많지만, 한편으로는 후반부 사적 처벌의 정당성과 카타르시스를 담보하는 부분이기도 한데 이 딜레마를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예고편에서도 볼 수 있지만 [복수]가 주인공에게 상냥한 영화는 아니다. 남성들은 그녀를 절벽에서 밀어 떨어뜨리고 그녀는 절벽 아래의 나무에 복부를 관통당한다. 나는 이 부분이 [복수]의 영리함이라 생각한다. 남성과 그녀의 물리적 거리가 벌어졌기에 더이상 남성에게 무력하게 당하는 여성이 화면을 비추는 일은 피하면서도, 폭력의 결과물은 자연의 형태로 여전히 그녀에게 고통을 주고 있기에 (게다가 이 영화는 신체 훼손 묘사에 거침이 없기에) 그에 대한 분노는 잊히지 않는다. 

[복수]가 훌륭한 이유는 장르 영화로의 본분을 잊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노련한 사냥꾼인 남성들은 만만한 적수가 아니기에 주인공 젠의 복수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세 명의 남성을 상대로 한 세 번의 액션 장면 모두 특히 두 번째와 세 번째 액션 장면은 손에 땀을 쥐게 한다. 게다가 세 장면 모두 전혀 다른 장소에서 벌어지는 전혀 다른 형태의 액션을 보여주기에 (여러 강간복수극에서 문제가 되는) 복수를 숙제하듯 해치운다는 인상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세 번째 액션 장면은 그 진수라 할 수 있는데, 총으로 무장한 두 인물이 시야가 제한되는 복도 형태의 순환형 공간에서 진행 방향을 바꿔 가며 상호 추격전을 벌이는데, 서로의 위치를 특정할 수 없는 데서 오는 긴장감, 뒤를 잡히면 안 된다는 절박감, 그리고 직선의 움직임이 번갈아 가며 비추어지고 진행 방향이 바뀔 때마다 발생하는 리듬은 대단하다. 이토록 강박적인 액션 장면을 근래에 본 기억이 있나 싶을 정도.

짐작하겠지만 모두를 위한 영화는 아니다. 신체 훼손 묘사는 무척 집요하다. 예를 들자면 관통된 나뭇가지가 빠지는 순간 살과 나무가 얽히며 나는 소리를 적나라하게 들려준다던가. 게다가 여러 장면에서 '사실성'에 집착하는 관객이라면 실소가 나올 만큼 비현실적인 부분도 있다. 애초에 복부를 관통당한 여성이 보일 수 있는 움직임이 아닌걸. 그런데 나는 '리얼리티'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되려 영화 중반에는 현실성을 중시하는 관객들을 의도적으로 비웃는 듯한 장면도 있는데 그 장면이 단순한 비웃음으로 끝나지 않고, 여성의 성장을 보여주는 데 중요하고 상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면서도 무척이나 신나서 카타르시스까지 선사한다는 점에서 점수를 높게 주고 싶다. 

너무 멋 부린다 싶은 부분들이 없는 건 아닌데 영화 전체적으로 젠체하지 않으며 편집증적이리만큼 처절하고 진지하게 접근하는 태도가 그 이상으로 와닿아서 별다른 거부감은 느끼지 못했다. 

70년대 강간복수극을 오마주하면서 그 약점들을 그땐 그랬지 식으로 익살맞게 얼렁뚱땅 넘기는 게 아니라, 이 장르에 애정을 품고 있는 감독이, 현대적인 관점에서 납득할 수 있으면서도 기본에 충실한 강간복수극을 만들기 위해 진지하게 접근했다는 것이 십분 느껴져 작품이라 더욱 마음에 든다. 한국에는 언제 어떤 방식으로 개봉할지 알 수 없으나, 감당할 수 있는 관객이라면 관람하길 권해보고 싶다. 극장에서라면 더더욱 좋다. 착취영화를 극장에서 본 건 처음인 것 같은데, 같은 공간의 관객들과 화면 속에서 벌어지는 일에 모두 함께 신음을 내며 움찔움찔하는 경험은 잊을 수가 없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