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만 100편을 훌쩍 넘는 영화를 보았으니 제법 많은 시간을 영화 관람에 할애한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왜 영화를 보는가?" 라는 질문에 답하기란 쉽지 않다. 하나의 명확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장 최근에 본〈로그 원: 스타워즈 이야기 (Rogue One: A Star Wars Story, 2016)〉와 〈동백꽃 없는 아가씨 (La Signora Senza Camelie, 1953)〉를 같은 이유에서, 같은 기대감을 품고 관람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조금 더 쉽게 답할 수 있는 질문은 "언제 앞으로도 계속 영화를 보아야 겠다는 생각이 드는가?" 일 것이다. 역시 여러 가지 상황이 있겠지만, 대표적으로 나의 이성적인 이해를 넘어서는 무언가를 영화 속에서 목격하고 체험할 때 영화에 시간을 아낌없이 퍼주어도 되겠다는 확신이 생긴다. 물론 책과 같은 여타 매체를 통해서도 이런 순간은 찾아오지만, 영화에서 찾을 수 있는 그것과는 조금 다르다고 생각한다. 활자 매체의 경우 얼마나 큰 감흥을 주는가는 나 자신의 상상력이나 주관적인 체험의 기억을 얼마나 떠올리게 하는가에 좌우되는 경우가 많지만, 영화의 경우에는 강렬한 시청각적 자극에 의해 애초에 그런 뇌의 기능 자체가 마비되는 듯한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인지를 넘어선다'는 표현은 시청각적 매체에 보다 적절하다고 보여지며, 나에게는 그 최전선에 영화가 있다.
여기에서 "언제 영화는 이성적인 이해를 뛰어 넘는가?"라는 의문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다시 답하기 쉽지 않은 질문이 돌아왔다. 나는 어떤 추상화된 이론이나 대표성이 있는 예시를 들어 설명하기를 포기한다. 애초에 이런 작품들은 그런 범주화에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이해를 뛰어넘는 것이다. 차라리 가장 최근에 이를 경험한 하나의 작품을 소개해 보고자 한다: 니콜라스 로그 감독의〈지금 쳐다보지 마 (Don't Look Now, 1973)〉가 바로 그것이다.
대프니 듀 모리에의 동명의 단편을 원작으로 한 줄거리는 단순하다. 비극적인 사고로 딸을 잃은 부부가 베네치아로 일종의 치유 여행을 떠난다. 아내(줄리 크리스티)는 죽은 딸이 보인다는 노부인 자매와 친해지며 심리적 안정을 찾고, 이를 사기로 치부하는 남편(도날드 서덜랜드)은 베니스의 여러 장소에 묘한 기시감을 느낀다. 노부인 자매는 베네치아에 남편이 있으면 위험하다는 딸의 목소리를 들었다며 아내에게 경고를 하지만 남편은 이를 무시하고, 이때 급작스런 사건이 생겨 아내는 베네치아를 떠나게 되는데 남편은 이후 아내와 노부인 자매를 먼발치에서 목격하고 이들을 찾아 베네치아를 헤맨다는 이야기이다. (결말 부분만은 생략한다.) 애초에 이 영화에서 플롯은 별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이 부부가 느끼는 다양한 감정을 어떤 방식으로 "그려내는가"이다.
숨이 멎을 정도로 아름다운 장면들이 많지만, "나의 이해를 넘어서는" 영화적 감흥은 바로 이 영화가 서덜랜드의 이해를 넘어서는 순간'들'(그렇다, 이 영화에는 그런 장면들이 넘쳐난다.) 에 찾아온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남편이 초현실적으로 체험하는 예지의 순간들, 도대체 무엇을 알리고자 하는지조차 명료하지 못한 그 순간들을 니콜라스 로그는 색채와 이미지를 매개로 삼는 몽타주 기법을 통해 제시한다. 그 찰나에는 마비가 된 것처럼 아무 생각도 못하고 이미지를 따라갈 뿐이며, 이 시퀀스를 다 보고난 후에야 간신히, 내 스스로가 영화 속의 서덜랜드가 된 마냥, 과거와 현재, 미래를 관통하는 초현실적인 체험을 했음을 깨닫게 된다. 체험 그 자체가 신비로우며 이것이 지극히 익숙한 기법을 통해 인간의 손으로 빚어진 명료한 스크린 앞의 이미지의 조합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이 또한 불가해하다. 이런 영화를 만나고 나면 글의 두번째 질문을 넘어서 첫번째 질문에까지 이렇게 답하고 싶어진다. 바로 이 순간을 겪기 위해 영화를 본다고.
이 글의 제목 또한 하나의 물음이며, 나는 이 글을 쓰는 내내 이 물음에 대해서 직접적으로는 언급하지 않았으나 이미 충분하리만큼 설명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