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쳐다보지 마(Don't Look Now, 1973)〉에 대한 글을 쓰고 문득 이전에 쓴 글이 떠올라 수정해서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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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베이 할인 기간에 주문한 〈위험을 무릅쓰고(On Dangerous Ground, 1951)〉가 도착하여 즉시 감상하고 나니 고다르가 했다는 “영화는 니콜라스 레이이다”라는 말에는 어떤 이의도 달고 싶지 않다. 영화는 니콜라스 레이이다.
레이의 영화적 순간에 대한 창작력은 고갈될 줄을 모른다. 특히 대화 장면을 연출해내는데 있어 레이를 따라갈 사람은 많지 않다. 레이 영화에서 대부분의 대화는 어떤 방식으로든 대립적인 위치에 놓인 사람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나는 레이의 영화를 볼 때 안온한 순간의 부재를 느낀다), 오고 가는 말들의 심층에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감정의 흐름과 긴장, 충돌을 담아내며 때로는 훗날을 위해 이를 인물들의 마음 속에 쌓아두고, 적절한 때가 오면 가감없이 분출시킨다. 이때 레이가 잘 활용하는 요소들이 말하고 듣는 방식, 표정과 몸짓, 시선과 위치 이동, 그들이 대화 중에 사물을 만지는 손놀림 등이다. 감정의 표출이 발화의 형식을 택하지 않기에 비로소 다양한 함의를 내포하게 되며, 나아가 스크린에 나타나는 방식 이외의 어떤 식으로든 정의내릴 수 없고 해석이 불가능한 경지에 이른다. 이것이 바로 오로지 영화만이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염세주의적인 폭력 경찰 로버트 라이언이 도시의 어둠 속을 누비는 영화의 반절을 지나면, 용의자를 추적하다 설원 속의 저택에 도착하여 맹인 여인(아이다 루피노)를 만나는데 이른다. 그녀를 겁박하여 용의자가 있는 곳을 알아내려는 피해자의 아버지를 제지하고 그녀와의 “대화”를 시도하다가 그녀에게 "감정"을 품게 되는 일련의 장면들에 넋을 잃었다. 이는 동정인가, 연민인가, 사랑인가 아니면 도시에서 자행했던 폭력의 순간에는 망각했던 죄의식이 뒤늦게 발현하는 것인가. 어느 하나의 해석으로 단정짓는 것은 불가능하며 기어코 그 전부를 담아낸다. 아이다 루피노의 빼어난 연기와 레이가 연출해내는 두 인물의 심리적 교류(와 충돌) 덕에, 관객은 영화의 중반이 지나서야 갑자기 등장하여 납득이 안될 정도로 용의자를 감싸고 드는 그녀에게 당황해하지 않을 수 있고, 오히려 라이언이 그녀에게 품는 감정에 (그것이 무엇이든) 공감하게 된다.
사실 이런 저런 설명을 붙여보지만 레이의 영화에서 등장하는 마법과도 같은 순간들 앞에서는 그 어떤 묘사도 빛이 바랜다. 겪어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직접 보기를 권하는 수 밖에는 도리가 없다. 감히 말하건데 그런 순간을 체험하는데 대한 갈망이 바로 내가 영화를 보는 중요한 이유이며, 〈자니 기타(Johnny Guitar, 1954)〉에서 자경단이 난입하는 가운데 비엔나가 하얀 드레스를 입고 피아노를 치는 장면에서 히죽거리고 폭소한 자들과는 영화에 대해 논하고 싶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