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단히 만족스러운 영화를 보고 나면 정작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망설여질 때가 있다. 폴 슈레이더의 역작 [First Reformed]를 보고 그런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도 두서없는 이야기들을 써보려고 한다. 이러면 역설적으로 글은 길어지게 마련인데... 몇 가지 다시 확인하고 싶은 부분이 있어 재관람을 하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다시 보면 첫 감상의 감흥이 사라질까 두려워 망설이다가, 상영 종료 당일에야 재차 극장을 찾았고, 결과적으로 이 영화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
[택시 드라이버 (Taxi Driver, 1976; 마틴 스콜세지)]를 시작으로 슈레이더가 이미 몇 번이나 써온, 세상의 부조리함을 참지 못하지만 자신도 병든 자의 이야기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택시 드라이버]의 트래비스 비클이 자기도취적이고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며 행동이 앞서는 사람이라면, [First Reformed]의 톨러 목사(이썬 호크 분)는 지성적인 사람이고 자신의 선택이 옳은지 끊임없이 묵상하고 고뇌하며 사람이며 사회와 융화되기를 의식적으로 거부한다.
과거에 군목이었던 톨러 목사는, 본인의 권유로 이라크 파병 부대에 입대한 아들이 죽으면서 결혼 생활도 파탄나고 깊은 죄책감에 빠졌다가, 대형 교회 "풍요로운 삶 (Abundant Life)"를 이끄는 목사 제퍼스의 도움으로, "풍요로운 삶" 소속의 유서 깊은 교회 First Reformed의 담임 목사로 부임한다. 성소(聖所)라기보다는 박물관이나 기념품 가게에 가까우며, 예배에 참석하는 신자 수는 열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 있는 이 교회에서, 톨러 목사는 수도사에 가까운 고독한 삶을 살아간다. 겉보기에는 멀쩡하지만, 그는 사실 아직도 내면의 절망을 떨쳐내지 못했으며 의도적으로 모든 종류의 사회 활동으로부터 자신을 고립시킨다. 그에게 도움을 청하는 신도들에게조차도 자신보다는 "풍요로운 삶"의 전문 상담가들에게 가기를 권유한다. 그는 혼자 있을 때는 기도조차 할 수 없으며, 쉽게 기도를 하는 이들은 사실 제대로 된 기도를 하지 못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결국 고통을 달래보고자 기도의 대안으로 1년 동안 내면의 생각을 낱낱이 기록하는 일기를 쓰기로 한다. 어느 날 신도 메리가 임신했음을 밝히며 그녀의 남편 필립과 상담하기를 청해온다. 필립은 극단적인 환경주의자로, 인간 사회는 환경 오염으로 멸망할 것이며, 이런 세상에 자식을 낳는 것은 죄악이라고 여겨 낙태하기를 원한다. 그는 대형 교회를 믿지 않으나, 비극을 극복한(혹은, 했다고 여겨지는) 톨러 목사에게 개인적인 존경심을 품고 있다.
영화는 전체적으로 톨러의 일기 내용에 해당하는 독백이 나오며, 침묵의 시간이 길지만, 대화 장면 또한 많고 중요하다. 슈레이더 자신을 비롯하여 [First Reformed]와 닮은 영화로 베리만과 브레송을 언급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 비유가 틀렸다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나는 대화 장면들을 보면서 장-피에르 멜빌의 [레옹 모랭 신부 (Léon Morin, prêtre, 1961)]가 떠올랐다. 특히 필립과 톨러의 대화 장면은 추상적이고 신학적인 내용을 다루면서도 굉장히 흥미롭고 재미있다. 톨러는 필립을 설득하려 하지만 사실은 필립의 논리(와 그가 품고 있는 절망)에 설득당한다.
앞서 트래비스 비클과 톨러 목사의 차이를 언급했는데, 근본적으로 [First Reformed]가 주목하는 바는 [택시 드라이버]와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물론 종교에 대한 관심이다. [하드코어 (Hardcore, 1979; 폴 슈레이더)]에서 이미 현대 사회 앞에서 무기력한 기독교 윤리를 목도한 바 있으나, [First Reformed]는 보다 정면으로 이 모순을 파헤치고자 한다. 극 중 톨러 목사에 의해 그 저작이 자주 언급되는 수도사 토마스 머튼과 "풍요로운 삶"은 슈레이더가 생각하는 종교의 양쪽 측면(예수의 삶을 따를 것인가, 예수의 말씀을 전파할 것인가)을 대표하는데, 양쪽 모두 장단점이 있으나 머튼의 방식은 현실에서 괴리되어 있으며, "풍요로운 삶"의 방식은 현실 자본과 지나치게 밀착해 있기 때문에, 두 방식 모두 정의를 실현하는데 그 한계가 뚜렷하다. 때문에 톨러는 어느 쪽에서도 답을 찾지 못하고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구현하겠다는 일종의 극단주의로 치닫는다. 나는 [First Reformed]가 이를 통해 미국의 극단적인 보수주의 기독교, 트럼프주의, 테러리즘, 지하디즘이 발생하는 메커니즘의 단면을 짚어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여느 좋은 영화가 그렇듯, 이는 영화를 구성하는 요소의 일부일 뿐이며 톨러 목사와 테러리즘의 비유 또한 뚜렷하게 성립하지는 않는다. 톨러의 결단은 그저 절망에 가득 찬 삶을 견디다 못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이들의 핑계 찾기일 수도 있다.
이 영화가 다양한 이해의 가능성을 내포하는 것은 첫째, 톨러 목사가 매우 모순적인 인물이라는 사실이며, 둘째, 메리의 존재이다. 톨러가 교회와 사회에 대해 품는 문제의식이야 타당하지만, 그 끝에 다다른 결론은 신성모독적이다. 그는 환경 보호론에 깊이 공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일부여야 마땅할 자신의 몸에는 지극히 무관심하다. 이는 필립 또한 마찬가지인데, 이 때문에 극단적 환경 보호론 자체가 영화의 메세지인 양 해석하는 (나는 지브리 영화 생각난다는 글까지 봤다) 일부 시각에는 동의할 수 없다. 슈레이더는 환경 보호론에 호의적이라고 생각하지만, 그와 별개로 이 영화에서 환경 보호론은 절망에 빠진 이들을 극단으로 치닫게 하는 기능과 오염된 지구의 이미지를 통해 톨러의 황량한 심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기능으로 쓰인다.
그런데 여기에 메리라는 변수가 존재한다. 메리라는 인물은 그리 주체적으로 기능하는 인물은 아니다. "톨러가 인지하는 메리"의 역할이 중요하다. 노파심에서 이야기하면 그렇다고 이 영화가 여성을 수동적인 존재로 그리는 그저 그런 영화인 것은 아니다. 톨러를 제외한 모든 등장인물이 톨러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영화에 등장하며, 톨러의 시선 밖에서 벌어지는 어떤 사건도 영화에 등장하지 않을 만큼, 슈레이더는 온전히 톨러에게 집중한다. (그리고 그 모든 짐을 짊어지고 모순덩어리 톨러를 생생하게 그려내는 이썬 호크의 연기는 여태껏 본 그의 어떤 연기보다도 빛난다.) 톨러에게 있어 메리는 일종의 트릭스터다. 메리는 톨러에게 무리하다 싶은 부탁을 하곤 하는데, 직접 언급되는 것은 아니지만 톨러는 이 부탁들이 싫지 않다. 톨러가 메리를 대하는 태도는 다른 여성 등장인물인 에스더에 대한 태도와 단적으로 대비되는데, 이는 에스더가 톨러를 걱정하고 보살피고 이해하려고 하지만(톨러는 이런 주변 인물들의 태도에 이미 질릴 데로 질린 걸로 보인다), 메리는 유일하게 톨러에게 의지하는, 그의 삶에 억지로라도 동기를 부여하는 인물이기 때문인 걸로 보인다. [택시 드라이버]처럼 마냥 삭막한 영화가 되지 않는 것 또한 관객에게, 톨러는 메리에게 해가 되는 일은 하지 않을 거란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메리는 톨러의 계획을 뒤틀어 놓는다. 그가 듣고 싶어 하는 대답을 들려주지 않고, 그가 바라는 데로 행동하지 않는다.
또 한 가지 언급해야 할 것은 톨러와 메리 사이의, 노골적이지는 않지만 명백한 성적 긴장감이다. 아마 톨러 목사 본인도 마지막까지 본인이 메리에게 품는 감정을 명확히 인지했으리라곤 보이지 않지만, 슈레이더는 손을 마주 잡고 드리는 기도와 같은 신체 접촉이나 함께 자전거를 타는 행위 등의 정서적 교감 등을 통해 은밀한 방식으로 성적인 긴장감을 쌓아 올린다. 그리고 이 성적인 긴장감이 극에 달하는 순간을 종교적 환희의 순간들과 연결함으로써 슈레이더는 매우 불온하고 흥미롭게 성과 종교의 밀접함을 포착하여 영화의 기저에 깔아둔다. 마지막 클라이맥스를 위해서.
결국 [First Reformed]에서 숨 막히도록 아름다운 두 순간은 모두 메리와 관련되어 있다. 한 장면은 메리의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프레임 일부를 가리는 장면이며, 또 하나는 마지막 클라이맥스인데 구체적으로 어떤 장면들인지는 언급하지 않겠다. 나는 이 두 장면이 결국 슈레이더가 영화 인생을 통해 도달하고 싶었던 장면이며, 그가 그토록 이야기하던 '초월'에 도달하는 순간이며, 이 영화가 위대해지는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그 초월이 현세에 일어난 기적인지, 극에 달한 종교적 황홀경인지는 영영 알 수 없지만.
여전히 이 영화를 불특정 타인에게 망설임 없이 추천할 수 있느냐고 하면 그렇지는 않다.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카톨릭 교육을 받으며 자라왔고 고등학교 시절 신앙을 버린 후에도 믿음과 논리의 갈등이나 신학적인 주제들에 항상 큰 흥미를 느껴왔다. 그래서 이 영화가 더욱 매력적이었는지도 모른다. 사람에 따라서는 별다른 흥미를 못 느끼거나 슈레이더의 외줄 타기가 그 도를 넘어섰다고 정나미를 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폴 슈레이더라는 70대 노장이 거의 경력이 끝나간다고 여겨지는 시점에, 아마도 영화를 시작하던 때부터 그리고 싶어 했을 주제로 영화를 이토록 멀끔하게 만들어냈다는 사실 그 자체로 감동적이지 않은가. 게다가, 슈레이더는 초월을 추구하는 영화는 상업적으로 성공할 수 없어 투자자의 돈을 되돌려 줄 수 없으므로 아마 평생 만들지 못하리라 젊어서부터 생각해왔는데,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초저예산으로 영화를 찍을 수 있게 되자 드디어 이 영화를 찍을 것을 결심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기술 발전의 신도라도 되고 싶은 심정이 되기까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