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에도 도착한 타이틀이 없다. 덕분에 잡담.

1. 요새 Powerhouse에서 출시한 풀러 박스 세트에 수록된 영화를 조금씩 보고 있는데, 아무래도 풀러가 직접 감독한 두 편이 가장 좋지만 완성도가 좀 떨어지는 다른 영화들도 등장 인물들이나 설정을 뜯어 보면 나름대로 흥미로운 구석들이 있다. 각본가 풀러의 영향이 어디까지 미쳤을지야 모를 일이지만, 내가 생각하는 풀러의 큰 특징이라면, 다층적으로 베베 꼬인, 트라우마와 컴플렉스를 한두개쯤 안고 있는 인물들이 독한 마음을 품으면서 벌어지는 사건들인데,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런 흔적들이 곳곳에 보인단 말이지. 말이 나온 김에 굳이 풀러와 로버트 알드리치랑 비교를 해보자면 알드리치의 인물들도 독하게 일을 벌이는 건 비슷하지만 그 독함의 근원이 트라우마나 컴플렉스보다는 신념과 아집이라는 인상이 강하다. 그래서 풀러의 영화들이 좀 더 뒷 맛이 씁쓸한가 싶다. 

2. [우주 전쟁 (War of the Worlds, 2005; 스티븐 스필버그)] 이제서야 봤는데, 이런 영화가 나한텐 바로 handshake movie다. 나의 취향이나 영화관(英畵觀)을 잘 드러내는 영화라기 보다는, 상대방의 태도를 가늠하는 리트머스로 굉장히 유용하기 때문."저는 [우주 전쟁]을 좋아합니다.", "저는 그 영화가 재미 없었어요", "아, 저랑은 영화를 대하는 태도가 다르군요". 

3. [우주 전쟁]을 보고 나니 전설적인 오슨 웰스의 라디오 방송 일화가 떠오르기도 하고, 마를레네 디트리히가 나오는 영화도 더 보고 싶어서 [악의 손길 (Touch of Evil, 1958; 오슨 웰스)]도 드디어 봤다. 이런, 매 장면, 매 프레임이 숨막히는 초걸작이잖아. 영화에서 보여주는 것 이상으로 뻗어나갈 여지가 많은 인물들과 세계관이고, 여러 층위에서 다양한 흥미롭고 위험천만한 주제들을 내포하고 있으면서도 플롯 자체마저 무척 재미난 끝내주는 영화였다. 디트리히의 출연 분량은 적었지만 그 위용을 아낌없이 뽐내서 그녀를 좋아하게 된 다음에 보게 되어 더 잘됐다는 기분도 든다. 그동안 웰스 영화(연출작이든 출연작이든)를 많이 보지 않았고, [강박충동 (Compulsion, 1959; 리처드 플라이셔)]를 제외하면, [제 3의 사나이 (The Third Man, 1949; 캐롤 리드)]도 [상하이에서 온 여인 (The Lady from Shanghai, 1947; 오슨 웰스)]도 나쁘지는 않았다 정도의 느낌이라 웰스랑은 별 인연이 없나 싶었는데 이런 보물을 놓치고 있었다니. 이제 나오자마자 사놓고는 미뤄둔 [심야의 종소리 (Chimes at Midnight, 1966; 오슨 웰스)]를 볼 차롄가. 그러고 보면 확실히 영화(영화인)와의 만남에는 다 때가 있다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든다. 

여담인데, 이대로 잘(?) 웰스 영화를 보아나가면 (내맘대로 호감을 품는) 위스컨신 출신 감독 (또 내맘대로 선정한) 3대장을 모두 만신전에 올릴 수 있지 않을까. 나머지 둘은 이미 상좌를 차지하고 계신 하워드 혹스와 니콜라스 레이. 

4. 요새 한국 정치권도 '올드보이' 운운하던데, 미국 영화계도 경력이 다 끝났다고 여겨지던 예전의 거장들이 돌아오는 걸 보면 올드보이 전성 시대가 아닌가 싶다. [제일개혁교회 (First Reformed, 2018)]의 폴 슈레이더에 이어 [BlacKKKlansman (2018)]의 스파이크 리까지. 다음 주에 보러가려고 하는데, 평들 만큼이나 흥미로운 영화였으면 좋겠다. 

5. 학교 시네마테크 다음 학기 프로그램 공개.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시리즈도 대환영이고 (아직 파스빈더 영화도 하나도 안 봄), 프랑스 영화들도 보고 싶지만, 이 모든 걸 제쳐두고 제일 좋은 건 [웃어라, 광대야, 웃어 (1928; 허버트 브레논)] 35mm 상영이다! 드디어 이 영화를 영업하게 되는구나. 다음 학기에 시간 여유가 없을 건 확실하지만 모든 걸 포기하더라도 이 영화만큼은 보겠다!!! (물론 [제7의 천국 (7th Heaven, 1927; 프랭크 보재기)]도 놓칠 수 없고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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