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브룩스는 비범한 연출가인가? 성실하고 뚝심있지만 연출가로 비범하다고 보긴 힘들다.
리처드 브룩스는 끝내주는 이야기꾼인가? 그렇고 말고.

나는 리처드 브룩스의 영화들이 과소평가 받고 있다고 생각하며, 더 언급될 필요가 있다고 믿는다. 영화미학적인 관점에서 바라볼 때 흥미를 가질 감독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내가 본 모든 영화에서 브룩스는 한결같이 매력적인 인물들을 만들고, 자기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숨기는 법이 없으면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굉장한 흡입력으로 대단히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뭘 더 바랄쏘냐. 


캔자스 주의 일가족 네 명을 잔혹하게 살해한 두 명의 전과자에 대한 트루먼 카포티의 유명한 "non-fiction novel"을 영상화한 [냉혈한 (In Cold Blood, 1967)]에서 브룩스가 택한 몇 가지 결정이 재미있다. 첫째, (브룩스와 가까운 사이이기도 했던) 트루먼 카포티는 각본을 보거나 촬영에 관여할 수 없다. 다만, 브룩스가 각본 작업에 착수하기 전에 카포티가 언급해두고 싶은 부분들을 미리 브룩스와 이야기할 수는 있다. 둘째, 주인공인 두 명의 전과자 역할로 유명 배우를 캐스팅하지 않는다. 자본을 댄 컬럼비아 영화사 측에서는 폴 뉴먼과 스티브 맥퀸을 섭외했으나, 브룩스가 거절했다. 훗날 브룩스가 프랑스 TV와의 인터뷰에서 말하길, 컬럼비아 영화사 측에 "세찬 바람이 몰아치는 한밤중, 외딴 농가에 누가 찾아와 문을 두드려 파자마 차림으로 문을 열었는데 폴 뉴먼의 얼굴이 있으면 '아이고, 폴, 어서 들어와 커피 한 잔 하지 그래요?'라고 하겠지만, 낯선 얼굴이라면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갑자기 두렵겠죠. 그게 이 영화에 필요한 겁니다."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셋째, 스크린에 카포티의 문체를 구현하여 현장감을 부여할 수 없으니 가능한 한 실제 사건이 벌어진 로케이션에서 사건과 관계된 사람들을 캐스팅하여 찍는 방식으로 이를 추구한다. 놀랍게도 주인공들이 범죄 전에 들르는 상점, 주유소, 범죄 후에 들르는 양복점, 가전 가게, 이후의 법정까지 모조리 실제 사건이 벌어진 공간들이며 영화에 등장한 농가가 촬영 7년전의 살인 현장이라는 사실은 섬뜩하기까지 하다. 심지어 실제로 범인들을 상대한 양복점 점원이나 재판에 참여한 배심원들을 그 역할에 그대로 캐스팅했다. 브룩스의 말에 따르면 비교적 연기 경력이 짧았던 두 주인공 배우가 역할에 몰입하게 하는데에는 실제 로케이션(특히 살인이 벌어진 집)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이런 종류의 무용담에 가까운 이야기들이 영화의 훌륭함을 담보하는 건 결코 아니다. 하지만 [냉혈한]은 [엘머 갠트리 (Elmer Gantry, 1960)]와 더불어 내가 본 네 편의 리처드 브룩스 영화 중에서도 각별히 빼어나다고 생각한다. (오해가 없으시길. 내가 본 나머지 두 편인 [프로들 (The Porfessionals, 1966)]과 [총알을 물어라 (Bite the Bullet, 1975)]도 대단히 훌륭하다.) 그리고 내가 [냉혈한]에 애정을 느끼는 이유는 이 영화의 훌륭함이 리처드 브룩스의 오뙤르로의 역량에서 기인하는게 아니라 일종의 고전기 스튜디오식 협업을 통해 달성되기 때문이다. [엘머 갠트리]와 [냉혈한]은 각각 존 알튼과 콘라드 홀이라는 굉장한 촬영 감독과 함께 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엘머 갠트리]를 존 알튼의 대표작으로 꼽기엔 무리가 있지만, [냉혈한의 콘라드 홀은 2시간 15분 내내 흑백 화면에서 빛과 그림자를 가지고 날뛰며 그의 진수를 마음껏 보여준다. 촬영감독 뿐만이 아니다. 원작자 트루먼 카포티는 말할 것도 없고 (리처드 브룩스는 검증된 원작을 각색할 때 빛나는 감독이기도 하다), 편집의 피터 진너, 음악의 퀸시 존스까지 이만한 스태프가 모인게 놀라울 정도. 애초에 각본가로 출발했고 대개 각본을 스스로 담당하곤 하는 브룩스 본인의 이야기꾼으로의 재능에 (윗 문단에서 언급한 선택들 역시 과시적이거나 작가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브룩스가 이 이야기는 스크린에서는 이런 방식으로 전달해야 효율적이라는 이야기꾼으로의 본능에 따라 선택한 결과물이 아닐까) 이 스태프들이 참여한 결과는 놀랍다. 

크라이테리언 사의 블루레이가 각별한 이유는 어마어마한 양의 부록을 넣어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부록들이 관람자들이 알고 싶어할 내용을 콕 짚어주기 때문이기도 하다: 리처드 브룩스 책을 쓴 작가의 리처드 브룩스에 대한 인터뷰, 촬영감독 존 베일리의 콘라드 홀에 대한 인터뷰, 피터 진너에 대한 인터뷰, 퀸시 존스에 대한 인터뷰, (위에 언급한 프랑스 TV와의) 브룩스 본인의 인터뷰, 여기에 트루먼 카포티에 대한 세 편의 영상. [냉혈한]을 좋아하고 이 영화의 미덕이 어디에서 오는지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사람들이 준비한 부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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