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살게 된 후 대부분의 영화를 블루 레이로 보고 있다. 작년 감상한 총 113편의 영화 중 70편이 블루 레이였다. 영화 선택의 보수화가 우려되는 부분이다. 예외가 없진 않으나, 블루 레이 구매는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안전 지향적이 될 수 밖에 없다. 신뢰할 만한 국내외 블로거들의 소개, 여기에 나의 취향으로 한 번 필터링까지 거쳐 구매하게 마련이고, 덮어 놓고 사고 싶어지는 영화를 밀어내고 긴가민가하는 영화들을 고르기란 쉽지 않다. 블루 레이 구매에 쓸 예산이 한정되어 있으니 당연한 방식이라고 생각하며, 올해는 조금 더 돈을 아껴 쓸 생각이라 이런 경향은 심화될 것이다.


감상의 폭을 넓혀주는 대안은 시네마테크와 스트리밍 서비스이다. 부끄럽게도, 훌륭한 프로그래밍을 선보이는 학교 시네마테크에는 상영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자막 없는) 영어 영화가 여전히 불편하다는 이유로 열심히 방문하지 않았다 (사실 비(非)영어 영화들 상영에도 별다른 열의를 보이지 못했으니 떳떳한 변명은 아니다). 올해 다짐을 해보자면, 시네마테크를 좀 더 자주 방문해 보려고 한다. 영어 영화도 피하지 말고 도전해 보려고 한다. 실제로 대사를 완벽하게 따라가거나 이해하지 못해도 만족스럽게 즐긴 영화들이 없는 것도 아니다. 


스트리밍 서비스는 매력적인 대안은 아니다. 제공하는 영화의 폭이 빈약하거나 (넷플릭스) 열악한 미국 시골의 인터넷 서비스 하에 쾌적한 감상 환경을 제공해 주지 못했다 (훌루). 게다가 내가 물리 매체를 구매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직접 그 물리적 실체 (케이스, 디스크, 자켓, 북클릿)을 만질 수 있는 영화에 흔쾌히 손이 간다는 것이니 스트리밍이 대안이 되는 것은 요원해 보인다. 새해 소망이 있다면, FilmStruck이 연내 블루 레이 플레이어나 PS4에서도 스트리밍 서비스를 시작했으면 하는 것이다. 훌루보다만 나은 영상 송출 안정성을 보장해 준다면 구독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영화를 고르기에 앞서 다른 이들처럼 보기 좋게 "2016년에 발매된 블루 레이 타이틀 톱 10"을 꼽지 않는 이유에 대해 변명을 좀 해보자. 


블루 레이 콜렉터임을 부정할 수는 없으나 가끔 타이틀을 제대로 대우하고 있는 것인지 회의감이 든다. 극히 드문 예외들을 빼면, 나는 부가 영상을 즐기기보다는 그 시간에 새로운 영화 한 편을 보는 것을 선호한다. 그 자체에 잘못된 점은 없으나 훌륭할 것임에 틀림없는 부가 영상들을 놓쳐 보내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다. 하나의 타이틀을 100% 즐기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무리해서 시도할 생각은 없으나, 손이 잘 안간다고 해서 부가 영상들의 가치를 모르는 것은 아니기에 언젠가는 부가 영상을 편히 즐길 심적 여유가 생겼으면 좋겠다. ) 이런 상황에서 어떤 타이틀이 좋았는지 꼽는 것은 부당하지 않을까? 


물론 부가 영상만이 블루 레이 타이틀의 가치는 아니며, 영화가 얼마나 좋았는지, (고전 영화의 경우) 복원은 얼마나 충실했는지, 어떤 기획 하에서 만들어진 타이틀인지, 북클릿이나 케이스 구성은 어떠한지 등 평가할만한 요소는 무척 많다. 그러나 2016년에 발매된 좋은 타이틀을 꼽는 것은 여전히 어렵다. 앞에서 말한 금전적인 이유 때문에 가능한 한 할인을 기다려 구입하기 때문에 내 2016년 구매 목록의 대부분은 2015년이나 그 이전에 발매된 타이틀이 주를 이룬다. 더구나 나는 아내와 함께 볼 수 있는 영화의 경우에는, 일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사놓고 바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날 그날 내가 보고 싶은 몇 개의 영화를 골라 아내에게 최종 선택을 위임한다. (뚜렷한 장점 몇 가지 때문에 이 방식을 꾸준히 고수할 생각이다.) 그래서 비록 보유하고 있다 하더라도 아직 보지 못한 2016년 발매 타이틀이 잔뜩 있으며 여기에 어떤 문제도 느끼지 못한다. 


(혹시 2016년에 발매된 좋은 타이틀에 대한 한국어 소개글이 궁금하신 분들은 아래의 훌륭한 두 리스트를 참고해 보시길. 

Dr. Gogol님의 "권해보고 싶은 2016년 출시 Blu-ray 약 열일곱 개",

Q님의 "2016년 최고의 블루 레이 스무 타이틀". )


"2016년의 블루 레이"를 꼽지 못하겠다면 가장 훌륭했던 영화를 꼽는 것은 어떨까? 이쪽은 정전(正典)의 나열이 되기 쉽상이라 재미가 없다. 올해의 명단에는 그와는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그것이 유난히 인상적이었던 한 두 장면을 가진 영화든, 참여한 사람들에게 애정이 생기게 된 영화든, 어떤 장르나 경향에 새롭게 관심을 두게 해준 영화든, 어떤 방식으로든 발견이라 부를만한 영화들 열편을 꼽아 보았다. 


먼저 마지막까지 고민한 작품들을 아쉬움에 제목만이라도 남겨본다.〈아이들의 시간 (The Children's Hour, 1961)〉, 〈확대 (Close-Up, 1990)〉, 〈피투성이 나비 (Una Farfalla con le ali Insanguinate (1971)〉, 〈여자 피부 속의 도마뱀 (A Lizard in a Woman's Skin, 1971)〉,  (〈비밀은 없다 (2016)〉, 〈영혼의 카니발 (Carnival of Souls, 1962)〉, 〈순수한 이들 (The Innocents, 1961)〉, 〈옴 샨티 옴 (ओम शांति ओम, 2007)〉, 〈배회자 (The Prowler, 1951)〉, 〈극악무도한 파이브스 박사 (The Abominable Dr. Phibes, 1971)〉.

10. 쌍협 (雙俠, 1971)


이보다 나은 장철의 작품이야 몇 편이고 들 수 있다. 그런데 굳이 마지막 한 자리를 이 영화로 고른 이유는 강대위도 적룡도 나오지 않는 한 장면이 강렬히 인상에 남았기 때문이다. 적룡이 이끄는 송나라 협객들이 금나라 요새를 공격하기 위해 건너야 하는 다리가 있다. 그런데 사실 이 다리는 함정으로 곳곳이 썩어 있어 건너려는 자들은 깊은 협곡으로 추락하게 된다. 때문에 적룡은 경공의 달인을 초빙하기 위해 자리를 비우며 동료들에게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것을 당부한다. 그러나 적룡보다 앞서 다리에 도착한 동료들은 이 다리를 건너려고 한다. 적룡이 실패할 경우에 대비해야 한다나? 그리고 한 명씩 천길 낭떠러지로 추락하여 죽는다. 대안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므로 한 명 정도 선발대로 나서 보는 것은 있을 법하다. 그런데 첫 협객이 죽고 나서도 그저 적룡의 도착을 기다리면 될 일을 가지고 두번째, 연이어 세번째가 나선다. 그리고 장철은 그들이 추락하여 골짜기에 널부러진 모습을 기어코 담아낸다. 관객이 볼 때 주인공도 아닌 이들이 성공할 가능성은 애초부터 없다. 그 압도적인 허무감, 그리고 예정된 죽음을 향해 홀린듯 돌진하는 에너지를 기대치 않은 부분에서 만났다. 


9. 동백꽃 없는 숙녀 (La Signora senza Camelie, 1953) 

영화 세계를 다룬 영화들은 대체로 노골적으로 혹은 은밀하게 그 세계에 대한 애정(애증?)을 드러내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초기 안토니오니 영화는 그 태도가 사뭇 다르다. 미모로 벼락 스타가 된 주인공 클라라는 연기력으로 인정받는 배우가 되고 싶어 하고 이를 위해 노력하며 주위 사람들은 그녀를 격려하고 도움을 주려고 하지만, 그녀의 감정과 의지는 그녀를 둘러싼 남성들에 의해 왜곡되며 그녀는 본인의 재능이 없음을 깨닫고 이에 순응하는 삶을 살고자 한다. 전해지지 않는 진심, 소통의 불가능성, 좌절되는 꿈은 다가올 '고독 3부작'을 예언하는 듯 하다. 그 서늘함과 차가움이 무엇 하나 덧씌우지 않은 솔직함으로 다가와 좋았다. 그 와중에 마지막에는 절망한 주인공이 스튜디오 앞에 운집한 엑스트라들을 헤치고 나아가는 정말 멋진 장면도 있다. 시대적으로 별 연관은 없으나 영화를 보며 왠지 지알로 영화의 여배우들이 겹쳐 보이기도 했다. 실제로 이런 처지의 배우들이 없지 않았을테고. 


8. 자식 딸린 늑대: 부모의 마음 자식의 마음 (子連れ狼 親の心子の心, 1972)


영화에 참여한 이들 스스로가 만들고 있는 영화가 말도 안된다는 걸 알고 이를 희화화하거나 '우리는 이게 바보같다는 걸 알면서도 만드는 거니까 쿨하다'는 식으로 빠져나갈 구석을 만들어 놓는 똑똑한 영화보다, 말도 안되는 영화 속 상황을 진지하게 대하며 정면 돌파 해내려는 영화들에 호감이 간다. 자식 딸린 늑대 연작은 작심하고 비판하자면 지적할 부분이 한두 부분이 아닌 영화들이다. 그러나 갈팡질팡하는 전개와 일관성 없는 주인공에 실소를 터뜨릴 상황에서도 어떤 식으로도 무마하지 않고 정면으로 돌파하려는 뻔뻔함이 좋아 시리즈를 계속 보게 되었다. 그러다 4편〈부모의 마음 자식의 마음〉에 이르자 플롯이 중구난방에다가 황당함에도 장면 장면을 진심으로 즐기고 있다는 걸 자각하고야 말았다. 결국 그 흔들림없는 진지함에 투항했다고나 할까. 물론 그것이 다가 아니다. 주인공 오가미 잇토의 압도적인 강함으로 인해 일대일 전투의 긴장감을 잘 살려내지 못하는 가운데, 이 검술 영화의 묘미는 일대다 전투에 있는데〈부모의 마음 자식의 마음〉의 클라이막스는 그 중 가장 훌륭했다. 오가미 잇토와 카메라가 모두 지형지물을 영리하게 이용하여 단조롭거나 무성의하지 않으며, 상대의 숫자가 일정 기준을 넘어가 버리니 먼지를 뒤집어 쓰고 옷이 넝마가 되어 가며 이를 하나 하나 베어 넘기는 (혹은, 베어 넘기는 연기를 하는) 배우 와카야마 토미사부로가 좋아졌다. 플롯이나 연출의 도움 없이도 배우의 육체적인 노동이 맨몸뚱이로 관객에게 호소하는 멋진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이 전투의 마지막은 황당하기 이를데가 없다. 필생의 숙적을 만났는데 이게 뭐란 말이야! 시리즈를 이어가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겠지만, 여기까지 오면 그 황당함마저 이 시리즈다워 정겨웠다. 

7. 스페터스 (Spetters, 1980)

오토바이에 빠진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네덜란드 시기 파울 페르후번의 청춘 성장 영화이다. 벌써 등장 인물들의 결말이 예상되지 않는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영화는 예상 가능한 비극으로 치닫는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페르후번 특유의 거리두고 바라보기가 적나라하게 빛을 발한다. 충격적인 방법을 통해 스스로에게 솔직해지게 된 인물이든, 바보처럼 보였지만 스스로의 한계를 가장 냉정하게 깨닫고 도덕적으로 꺼림칙한 방식으로 기회를 잡고는 즐거워하는 인물이든 페르후번은 어떤 삶이 더 나은지, 바람직한지, 그들이 과연 성장하긴 한 것인지 말하려 들지 않고 묵묵히 보여준다. 따라서 온갖 '가르침'과 '알레고리'가 덧씌워진 인물들이 주제의식의 도구로 전락하는 영화들과 달리 그의 작품은 살아 꿈틀거린다는 느낌이 든다. 

6. 자정 10분 전 (10 to Midnight, 1983)

《자식 딸린 늑대》연작의 진지함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이 영화를 따라오려면 멀었지. 거의 종교 의식을 행하듯 옷을 다소곳하게 벗어 개어 놓고 범행을 저지르는 살인마를 늙은 형사가 쫓는다. 장르적인 것을 마구 비트는데도 젠체하지 않으니 마음에 들 수 밖에. 나체로 칼을 들고 대로를 질주하며 희생자를 쫓는 범인을 신나고 (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정말로 이 장면은 신난다) 긴박하게 묘사하다가 갑자기 도덕적 질문까지 묵직하게 던지는데 이 모든 흐름에 하나도 어색함이 없다. 

5. 테네브레 (Tenebrae, 1982)

감히 지알로의 해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올 한 해 수많은 지알로 영화들을 보았다. 그 중에서도 〈테네브레〉를 꼽게 된 이유는 결국 독창적인 살인 장면 연출이 주는 쾌감 때문이다. 이후로도 여러 편의 지알로들을 보았지만 카메라가 이토록 우아하지만 과감하게 날뛰고 도발적인 음악까지 합쳐져 리듬감을 뽐내며 살인 행각을 묘사하는 영화는 없었던 것 같다. 특히 추상적으로 생긴 건물의 상하좌우로 카메라가 질주하며 마치 범인이 어디있는지 관객과 게임을 벌이겠다는 듯 도발적으로 훑어대더니 일순간 건물 안으로 대담히 들어가 살인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시퀀스는 도무지 잊혀지지 않는다. 지알로 영화들이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영향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지인에게 듣고 바로 이 장면을 떠올렸다. 

4. 그들은 소모품이었다 (They Were Expendable, 1945)

예상가능한 훌륭한 영화를 뽑기 싫다는 이유로〈위험을 무릅쓰고 (On Dangerous Ground, 1951)〉도 <오니바바 (鬼婆, 1964)〉도 명단에서 뺀 주제에 존 포드 영화를 넣는 건 뻔뻔하긴 하다. 변명을 하자면 존 포드 영화가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 선전영화라는 점에 방점을 찍고 싶다. '주제 의식'이 분명해야 할 영화가 존 포드 작품 중에도 유례없을 정도로 데카당스하다. 대전쟁의 한 가운데서 가까스로 형성된 존 포드 공동체는 단단한 서부의 대지가 아니라 언제 함락될지 모르는 필리핀에 자리잡고 있으며, 자발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국가의 필요에 의해, 그것도 애초에 2류 전력으로 분류된 어뢰정 부대라는 점에서 그 정체성마저 불안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몇 번의 승리를 거두기도 하지만 결국 예정된 패배의 수순에 따라 기지와 부하들, 어뢰정까지 공동체를 만들었던 모든 것을 잃는다. 어쩌면 그 상황에서도 국가의 부름에 충실한 로버트 몽고메리야 말로 존 포드가 보여주고 싶은 진짜배기 전쟁 영웅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보다는 몰락을 받아 들이는 공동체의 태도가 눈물겹게 비통하고 아름다웠다. 여기에는 체념과 운명에의 순응이 있지만, 그들의 책임감을 잃지 않는다. 지나치게 무겁게 들리지만, 존 포드 특유의 공동체적 유대감이 생명력을 불어 넣는다. 물론 침울할 때도 있지만 그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웃음과 노래를 잃지 않으며 패전의 예감 앞에 그 유대감이 찬란히 빛난다. 

3. 지금 보면 안돼 (Don't Look Now, 1973)

내 마음 속에서〈표범 (Il Gattopardo, 1963) 〉, 〈자니 기타 (Johnny Guitar, 1954)〉, 〈하나 그리고 둘 (Yi Yi, 2000)〉,〈세이사쿠의 아내 (清作の妻, 1965)〉의 반열에 올릴만 한 영화다. 이전까지 전혀 작품을 접해본 일이 없는 감독의 영화를 처음 보고 그가 스크린에 펼쳐내는 비전의 위대함을 즉각적으로 깨닫고 압도되어 그 경이로운 순간들이 끝을 향해 달려간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 아니라 단순히 영화 한 편을 넘어서 미지의 다른 영화들을 포함한 그 감독의 영화 세계 전체를 덮어놓고 긍정하고 싶은 충동이 들게 만드는 영화들이다. 

2. 산의 소리 (山の音, 1954)


올해 초 나루세 미키오 특별전에서 만난 걸작. 도저히 어떤 단어로도 설명하기 힘든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의 아련한 감정을, 단지 걷는 두 사람을 트래킹하는 카메라를 통해 전달해내는 순간은 마법같다. 끝없이 변화하는 미묘한 감정들의 덩어리를 이토록 섬세하게 포착해낼 수 있는 건 나루세 미키오 뿐 아닐까.〈딸, 아내, 엄마 (娘, 妻, 母, 1960)〉과 이 영화 중 어느 영화를 넣어야 할지 많이 고민했는데 그 장면에 대한 기억을 뿌리칠 수가 없다. 


1. 흡혈귀들 (Vampires, 1998)

그래, 올해의 장르가 지알로라면 올해의 영화는 바로 이거다. 수컷 에너지로 가득찬 영화인데 한국 영화들 마냥 여자한테 분풀이하고 폭력을 과시하는 방식으로 투영하지 않는다. 이 영화의 폭력은 거의 일상적인 노동에 가까운 방식으로 묘사되고, 따라서 액션을 선보이는 사람들에게서도 전문가의 침착함이 느껴진다. 오히려 이 영화의 마초적인 감성이 가장 잘 드러난 부분은 마지막에 두 전우가 적이 될 것을 예감하며 이별하는 장면이지. 영화의 장르가 시시각각 바뀌는 것 같은 플롯임에도 각 장면의 연출과 장면들을 잇는 감정선의 일관성, 그리고 착취적으로 넘어가기 쉬운 그 어떤 상황에서도 각 인물에 대한 존중을 잃지 않는 점까지 부족한 구석이 없다. 쇠사슬과 모터의 움직임을 중심으로 루틴을 수행하듯 묘사되는 첫 흡혈귀 사냥 씬에서 폐쇄 공간에서의 긴장감, 이를 탁 트인 공간으로 급작스럽게 전환시키며 액션의 유형을 완전히 바꿀 때 오는 해방감, 분업/협업이 수행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쾌감에 입을 떡 벌리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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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영화의 장면 캡쳐나 자켓 이미지를 넣고 싶었지만 그것까지 할 에너지가 없다. 2017년 결산에서 시도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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