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TV 애니매이션〈카우보이 비밥〉을 짬날 때 다시 보고 있다. 그런데 예전의 감흥이 느껴지지 않는다. 과묵한 애니매이션으로 기억했는데 말이 너무 많고, 그 대사들은 멋부림이 지나쳐 되려 어색하다. 처음 보았을 때는 '의미심장'한 대사들이 깊이있게 느껴졌는데 지금은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간 채로 허세를 부리는 것으로 보일 다름이다. 정서와 코드를 공유하는 전문가들이 별다른 의사 소통 없이도 서로를 이해하는 순간들은 여전히 보기 좋지만 기어코 펀치라인을 끼워 넣으려는 욕망을 자제하지 못해 흥이 깨지고 만다.
순전히 최근에 보고 있기 때문이긴 할텐데, 버드 뵈티커 영화들이 떠오르는 지점이다. 뵈티커의 영화에서 대화들은 지극히 평범한 문장들로 이루어져 있으나 그 대화가 이루어지는 상황, 이전의 대화와의 연관성, 그리고 대화 참여자들이 공유하는 코드와 가치관 하에서 대놓고 주목받으려는 노력 없이도 다채로운 의미를 담아낸다. 이런 걸 보고 나면 도무지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
과장된 표현 자체가 나쁘다고 보지는 않으며, 그것을 두드러진 스타일로 전면에 내세우는 작품들도 싫어하지 않는다(〈천원돌파 그렌라간〉). 내가〈카우보이 비밥〉에서 느끼는 불편함은 정서적 과잉을 쿨하게 표현하려는 데에서 온다. 직설적인 표현을 구구절절 내뱉는 것은 촌스럽다고 생각했는지 대사의 길이와 양을 줄이고 그 대사들에 온갖 시적인 표현을 섞어 최대한 냉소적으로 발화하려 하는데, 미숙한 나르시즘으로 느껴질 뿐이다. 사춘기 정도의 소년이라면 모를까 스파이크나 제트 같은 성인 남성들이 명대사를 읊고 있는 걸 보고 있자니 내가 다 민망해진다.
차라리 예전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던 나머지 두 인물을 보는 재미가 있다. 페이는 본인의 욕망에 솔직하고 삶을 개선하려는 의욕도 충만하다. 에드는 아예 이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기에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하다. 그래서 그런지 원래 기억에 남았던 스파이크나 제트 중심의 느와르 풍 에피소드들보다 네 명이 모두 일정 수준의 역할을 수행하는 단편들에서 훨씬 좋은 인상을 받고 있다. 두 여성이 아저씨들이 자아도취에 빠질만한 순간을 최대한 막아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