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동안 샌프란시스코에 다녀왔다. 주목적은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두기봉 기획전이었고 총 네 편의 두기봉 영화를 보았다. 역시 두기봉이라며 탄복하면서 본 작품도 있었고, 뚜렷한 단점 (주로 불쾌한 캐릭터와 관련된) 때문에 보는 내내 마음이 편치는 않았지만 여전히 흥미로운 작품도 있었다. 그런데 Cops and Robbers라는 부제가 무색하게도, 그 중에서도 가장 좋았던 한 편은 소방관 영화〈십만화급 (十萬火急, 1997)〉이다.
두기봉 영화를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 권할 만한 영화는 결코 아니다. 전반부와 후반부가 칼로 무 자르듯 나눠지는 영화인데, 전반부는 다양한 소방/구조 활동들을 짤막짤막하게 다룸과 동시에 각 소방대원들의 개인사에 시간을 할애한다. 그런데 개인사 부분은 거의 상투적, 의례적인데다가 4인의 주요 인물의 에피소드를 다루려다보니 개별 에피소드 또한 깊게 나아가지 못하며 나열 식이라 그리 흥미롭지 않다. 더구나 음악의 사용도 별로다. 감동적인 음악, 긴장되는 음악 딱 두 가지 멜로디를 만들어 놓고 돌려쓰는 방식인데다 멜로디 자체도 진부하다.
그런데 후반부에서 이 영화는 빛난다. 폐공장에 대화재가 발생하여 전 홍콩의 소방대원들이 진압에 투입된 가운데, 주인공 팀은 혹시 있을지 모를 생존자를 찾기 위해 건물 내로 진입한다. 그리고 불이 번지기 시작하면서 그들은 생존자 수색은 커녕 스스로의 생존이 위태로운 처지에 내몰리고 건물 밖으로 어떻게든 탈출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영화는 무려 (체감상의 길이이므로 틀렸을 지도 모른다) 30분 이상을 이 탈출 장면에 사용한다.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며 주인공 팀을 덮치는 불길, 그리고 불길과 함께 돌진해오는 공장 내 자재들, 그 와중에 해야 할 일들을 해나가는 등장 인물들, 두기봉의 솜씨는 바로 이 장면만을 기다린 것처럼 아낌없이 발휘된다. 재미있게도 다른 재난 영화 등에서 등장할 법한 가족과의 유대 등의 모티브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심지어 전반부에 그렇게 개인사들을 풀어 놓았음에도 두기봉은 마치 없었던 일 마냥 이를 깡그리 무시한다. 오로지 강조되는 것은 현장에 있는 소방관들 사이의 팀워크와 유대감, 소방관으로의 소명 의식 뿐이다. 눈치챌 수 있겠지만 두기봉 범죄 영화의 코드들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천국과도 같은 순간이 펼쳐진다. ( 실제로 두기봉 연구서를 펴낸 스테판 테오와의 인터뷰에서 두기봉은 처음으로 '집단'이라는 개념에 주목하게 된 영화로〈십만화급〉을 꼽은 바 있다. )
이때 주목하고 싶은 것이 소방관들의 독특한 몸동작이다. 두기봉이 그리는 소방관들은 연기 속에서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팔을 둥그렇게 뻗어 연기를 위로 쓸어올리는 행동을 천천히 반복하며 전진한다. 이것이 얼마나 사실적인 묘사인지는 알 수 없으나, 첫번째로 드는 감정은 생소함이었다. 대체 소방관 영화에서 일종의 율동에 가까운 몸동작을 보리라고는 나는 상상도 못했다. 그런데 그 생소함이 그들에게 전문성을 부여한다. 굳이 이들이 얼마나 전문가인지 말하지 않아도 일반 관객이 예상조차 하지 못한,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마땅히 필요한, 동작을 침착히 수행하는 이들을 보는 것만으로 신뢰감을 갖게 된다. 이 장면의 효과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매캐한 연기가 깔린 스크린에 팔로 연기를 걷어내는 소방관들이 일렬로 전진하는 모습이 서서히 드러나는 장면의 비장감은 엄청나다. (게다가 그 선두의 배우가 결의에 찬 표정의 유청운이라면!) 관객이 체감하는 화재 현장의 속도는 무척이나 급박한데, 팔놀림과 전진이 느리게 반복되는데다가 팔의 움직임에 맞춰 흩어져가는 연기의 흐름마저 담아내니 이건 슬로우 모션이 아님에도 마치 그 유명한 두기봉의 슬로우 모션 클라이막스들같은 느낌마저 준다. 이 영화에서 가장 오래 머릿속에 남을 것은 결국 이 이미지이리라 확신한다.
필름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해보자. 미국내 공식 수입사였던 Palm Pictures에서 프린트를 제공한〈전직살수 (全職殺手, 2001)〉를 제외하면 나머지 세 편의 프린트는 American Genre Film Archive가 보유한 판본이다. 상태는 놀랄만큼 양호했는데, 〈암전 (暗戰, 1999)〉초반부에 음향이 좀 튀는 걸 빼면 보는데 전혀 불편함이 없었다. 이제 필름 스캔 및 블루레이 제작이 이루어지는 것도 좀 보고 싶은데. 〈신탐 (神探, 2007)〉을 제외하면 영미권 레이블에서 두기봉 타이틀에 이상하리만치 관심이 없는 거 같아 뭔가 판권 문제가 얽혀 있는지 의심이 갈 정도.
기회가 된다면 마지막 주에도 가서 대담도 듣고 보존 상태 양호한 35mm 필름으로 두기봉의 대표작들을 보고 싶은 심정인데 (특히 여전히 블루레이가 출시되지 않고 있는〈창화 (槍火, 1999)〉를 보고 싶다), 어떻게 될지는 아직 미지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