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이 되기 전에 본 영화지만 Noirvember를 맞아 글을 써본다. 

작년 UCLA 필름 & 텔레비젼 아카이브와 필름 누아르 재단이 함께 복원한 두 편의 영화 중 [분주하는 여자 (Woman on the Run, 1950; Norman Foster)]를 보았다. 샌프란시스코 시민 프랭크 존슨은 산책 도중 살인 현장을 목격하지만 경찰의 보호를 피해 잠적한다. 관계가 소원한 그의 아내 엘레노어 (앤 셰리단)는 프랭크가 복용해야 하는 약을 전달하기 위해 그의 행방을 추적하다가, 그 과정에서 그가 아직 사랑을 간직하고 있음을 깨달아 가는 이야기. 

줄거리 요약만 보면 기대보다는 걱정이 앞선다. 부부 관계의 문제를 해결하는 역할은 엘레노어에게만 맡겨지며, '대놓고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은 아내를 깊이 사랑하는' 남편의 진면목을 알아가면서 애정을 회복한다는 이야기에 이 무책임하게 잠적해버린 남편은 별다른 기여를 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지적은 대체로 유효하다.

하지만 여느 좋은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분주하는 여자]가 품고 있는 미덕은 시놉시스에 드러나지 않는다. 영화의 가장 큰 아이러니는 엘레노어가 애정을 회복하며 남편을 찾아 나서는 여정이 동시에 그녀를 돕는 기자 레게트와 함께 수수께끼를 해결하는 과정이자 나아가 남편을 죽음으로 인도하는 길이라는 점에 있다. 그녀는 까맣게 모르고 있지만 목격자를 제거하려는 살인범이 그녀의 행적을 밟아 프랭크에게 다가가고 있기 때문이다. 중반 이후 상황을 파악하고 있는 관객은 그녀의 행적에 미묘한 감정을 품게 된다. 레게트는 호감이 가는 인물이며, 엘레노어가 남편의 행방을 쫓는 상황만 아니라면 레게트와 엘레노어의 로맨스가 발전해 나가는 상상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게다가 그녀가 경찰의 추적을 피해 남편과 접촉하려는 시도가 성공하기를 바라다가도, 그녀가 살인범을 남편에게로 이끄는 상황을 답답해하고 경찰이 빨리 그녀를 따라잡아 비극적인 결말을 미연에 방지하기를 간절히 바라게 된다. 일견 상충되는 이 감정들을 최후의 최후까지 조율해내고, 덕분에 이 영화는 지루할 틈이 없다.

엘레노어의 복잡한 여정에 등장하는 조연들은 영화의 세계관을 다층적이고 풍요롭게 만든다. 초반에는 엘레노어를 압박하고 몰아붙이는 차가운 모습으로 등장하다가 중반 이후 따뜻한 면모를 보여주며 '우리 편'으로 돌아서는 페리스 경위나, 주인공 부부보다 훨씬 흥미로운 사연이 숨어 있을 것 같은 중국 식당 종업원 샘과 수지의 관계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의 존재가 [분주하는 여자]를 단순히 도식적이고 교훈적인 부부 관계 회복 이야기에서 벗어나게 만든다. 

물론 지독히도 인상적인 클라이막스 장면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유원지가 등장하는 많은 영화들 중에서도 고유의 특성을 최대한으로 끌어내는데 이만한 작품도 드물다. 대담하게 말해보자면 [상하이에서 온 여인 (The Lady from Shanghai, 1947; Orson Welles)]이나 [열차 안의 낯선 자들 (Strangers on a Train, 1951; Alfred Hitchcock)]보다도 낫다고 본다. 먼저, 드러내선 안되는 감정을 품은 이들의 은밀한 장소에서의 만남과 헤어짐을 다룬다. 이 과정에서 서로의 처지를 고려한 완곡한 대화를 통해 권유와 거절이 이루어지는데, 노골적이었다면 되려 상투적인 감정이 되었을 지점에서 찰나의 순간의 연기와 연출을 통해 복잡한 깊이와 여운을 담아내는 솜씨가 대단하다. (스포일러: 게다가 레게트는 엘레노어의 남편을 살해하려는 당사자이기에 '남편과 잘 안될 경우 어떻게 하겠느냐'는 식의 대사는 더욱 위험천만하고도 로맨틱하다. )  

이후 롤러 코스터를 이용한 압도적인 명장면이 등장하는데 이건 정말 압도적으로 훌륭하다. 롤러 코스터라는 기구가 갖는 속도, 높이와 소음이라는 속성들을 십분 활용함과 동시에 일단 한 번 타면 정해진 코스가 끝나기 전까지는 절대로 중도하차가 불가능하다는 특징을 십분 활용하여, 롤러 코스터에 탄 사람 본인이 위험에 처한 것이 아님에도 그 어떤 공포 영화에 등장하는 롤러 코스터보다도 끔찍하고 안타까운 체험이 스크린을 넘어 관객에게 전해진다. 굳이 부연하자면 히치콕이 남자 주인공에게 즐겨 부여하는 무기력함을 여성 주인공이 겪어야 하는데 어찌할 도리가 전혀 없다. 몸을 가눌 공간조차 없는 상황에서 표정 연기만으로 모든 감정을 담아내야 하는데 여기에서 앤 셰리단의 연기란! 이 한 장면을 위해서라도 [분주하는 여자]를 꼭 보시라 권하고 싶다. 

큰 기대 없이 에디 멀러를 믿고 + 상영 시간이 짧아 본 영화인데, 숨겨진 보물같은 누아르였다. 역시 누아르 짜르의 안목은 명불허전이다! 함께 구매한 [눈물을 흘리기엔 너무 늦었다 (Too Late for Tears, 1949; Byron Haskin)]은 또 어떨지 궁금하네. 이 두 작품 이후에는 UCLA 아카이브가 기획하는 누아르 작품에 대한 복원 소식이 없는 듯 한데, 앞으로도 알려지지 않은 필름 누아르 영화 발굴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참고로 블루레이는 미국의 Flicker Alley와 영국의 Arrow Academy에서 같은 원본 소스를 사용해서 출시되었는데, 할인 행사를 이용하면 영국판 쪽이 훨씬 저렴하며 한국 블루레이 플레이어를 포함한 지역코드 A 플레이어에서도 재생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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