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저녁에 잠깐 짬이 나서 [사형집행인들 또한 죽는다! (Hangmen Also Die!, 1943; Fritz Lang)]의 앞부분을 보는데까지 보고 할 일을 한 뒤 밤에 나머지를 보려고 했는데, 너무 재미있어서 멈추지 못하고 결국 끝까지 다 보고나서야 일어났다. 

게슈타포의 창설자이자 히틀러의 사형집행인이란 별명을 얻은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암살을 그린 반나치 스릴러인데, 1942년 6월에 실제 암살이 벌어졌고 1943년 4월에 이 영화가 개봉했으니 거의 암살 소식을 접하자마자 제작에 착수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전쟁 중이기도 하고 악명 높은 적국 간부의 암살 과정을 픽션으로나마 보고 싶어 했을 미국 관객들(과 보여주고 싶어 했을 미국 정부)의 심정을 고려해보면 나치의 악랄함과 암살자들의 영웅적인 면모를 홍보하는데 주목해야 마땅할 터이지만 정작 그런 반나치 영화는 찾아 보기 어렵다. 표면적인 목표 이상의 무언가를 갖고 있는 영화만 이제까지 살아 남았을 수도 있고. [사형집행인들 또한 죽는다!]에서도 정작 하이드리히는 영화 시작 5분만에 저격당하며, 심지어 이 영화에는 다른 영화라면 클라이막스에 해당할 저격 장면은 등장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2시간 15분 동안 무엇을 보여주는가. 암살자를 보호하고 배신자를 제거하려는 체코 레지스탕스와 실행범을 체포하려는 게슈타포 간의 치열한 정보전이다. 여기에 또 하나의 축이 더해지는데 바로 관객이다. 게슈타포가, 레지스탕스가 어떤 정보를 갖고 있는지 관객은 그 전모를 파악할 수 없고, 따라서 그들이 표면적으로 보여주는 반응을 통해 함께 정보전을 펼치는 수 밖에 없다. 이 영화의 엄청난 몰입감의 비결 중 하나는 바로 프리츠 랑이 관객에게 거는 이 게임에 있다. 

이 다양한 그룹들이 어떻게 정보를 전달하고 습득하고 교란하고 통제하며 가공하고 조작하는가가 영화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약 스티븐 소더버그 같은 감독이 이런 내용을 다룬다면 정보 전달의 각각의 고리가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특유의 리듬감있는 편집으로 연출했을 것이다. 그런데 랑은 이런 길을 택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보 네트워크의 작업을 통해 드러난 결과들을 주로 묘사하면서 각각의 고리가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움직였는가를 이해하는 것은 관객에게 맡긴다. 작년에 보고 실망을 금치 못한 [마스터 (2016; 조의석)] 마냥 무책임하게 '어떻게'를 배제한 채로 "사실은 나는 다 알고 있었다"는 식의 반전을 노린 결과만을 강조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마스터]에서 정보의 가치를 전혀 느낄 수 없는 반면 (그것은 아무런 노력없이 처음부터 공짜로 인물들에게 주어진 것에 가깝다), 랑의 영화에서는 제시된 단서들만으로도 정보가 어떤 식으로 움직였는지 추리하는 것이 가능하고 이를 바탕으로 네트워크를 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랑의 영화는 그 전모를 보여주지 않음으로 해서 우리가 보고 있는 것 이상의 거대한 네트워크가 배후에 존재한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게 하며, 화면에 드러나지 않는 것들을 통해 마치 탈출구없는 미로와도 같은 랑의 세계관이 구축된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지점이 또 발견된다. 정보를 활용하여 상대방을 제압하고자 하는 네트워크들의 경쟁을 그리다보니 점차 각 네트워크의 행동들에 정당성을 부여하는데는 무심해지고 자연히 네트워크들은 서로를 닮아간다. 때문에 반나치 선전 영화라기에는 미심쩍고 나아가 의뭉스러운 구석들이 도처에 드러난다. 예를 들어 무고하게 희생되는 인질들 때문에 자수를 결심한 암살범 스보보다를 레지스탕스 지도자 데디치는 스보보다의 자수가 나치에의 굴복을 의미하며 체코 인민의 저항 정신을 꺾게 될 것이라는 논리로 만류하여 설득시키지만, 이는 스보보다가 제기한 근본적인 문제, "무고한 이들을 희생시키는 저항 운동은 무고한 이들을 희생시키는 게슈타포에 비해 정당한가?", 라는 의문에 대한 답이 될 수 없으며 이후 이 문제점은 스보보다를 향한 마샤의 대사를 통해 반복해서 지적되지만 영화는 여기에 답을 하지 않은 채 네트워크의 일부로 활약하는 마샤를 보여주는 것으로 어물쩍 넘어가고 있다. 이는 [거대한 열기 (The Big Heat, 1953; Fritz Lang)]과 같은 훗날의 영화에서도 공통적으로 보여지는데, 이 영화에서 글렌 포드가 분한 주인공 배년은 처음에는 정의로운 열혈 형사처럼 보이나 나중에는 자신이 상대하는 네트워크를 붕괴시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관객으로서는 '이래도 되나?' 싶은 기분이 자꾸 들게 되는데, 이 자체도 일종의 관객에게 거는 게임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스포일러 : 게다가 레지스탕스 작전의 결과 배신자인 차카가 하이드리히 암살범으로 처형 당하는데, 실제 역사에서는 하이드리히 암살 작전에 참여한 특공대와 레지스탕스 단원들이 모두 체포되어 처형당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그 사건이 벌어진지 1년만에 어찌 보면 고인들을 욕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런 '대체 역사물'을 만들어 낸건데 진짜 이래도 되나?

무리수를 조금 던져보고 싶다. 무언가를 이루어냈다는 점을 제외하면 이 영화에 나오는 레지스탕스에 대한 관점은 [그림자 군단 (L'armée des ombres, 1969; Jean-Pierre Melville)]을 연상시키는 데가 있다. 물론 멜빌이 거칠게 말해 [그림자 군단]의 인물들에게 회한과 자기 성찰의 감정을 품고 있다면, 랑에게는 그런 것이 전혀 없고 오히려 이 도덕성에 대한 고려가 배제된 인물들에게 흥미를 느낀다고 해야겠다. 무리수를 한 번 더 던져보면, 이는 현대 사회를 바라보는 미하엘 하네케와 파울 페르후번의 유사한 듯 하면서도 명백히 차이나는 시각과도 닮은 꼴이 아닐지? 

또 하나의 흥미로운 조각이 마샤의 약혼자 얀이다. 그는 레지스탕스와 게슈타포, 그 어느 쪽 네트워크에도 속해 있지 않은 인물이다. 그는 어떤 면에서 체코의 일반 시민을 대변하는데, 이들은 점령군인 나치 독일에 대해 악감정을 품고 있지만 암살범 한 명 살리자고 유력 인사들이 하나씩 처형당하는 현실 또한 불편해한다. 그리고 이 인물을 이용해서 랑은 자연스럽게 극적인 클라이막스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왜냐하면 얀은 아무런 설명을 듣지 못한 채 신뢰하던 이에게 배신당하지만, 진상을 파악하는 순간 단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본인이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실행하기 때문이다. 치밀하고도 광대한 상대방 네트워크의 특성을 이용하여 이 광대한 네트워크를 넘어서는 엄청난 수준의 네트워크를 상대방이 진상을 파악할 틈을 주지 않고 일순간에 구축해내는데, 개개의 네트워크 참여자들이 어떻게 결단하게 되었는가를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그런 행동에 반감을 가져도 이상하지 않을 인물인 얀마저 단호하게 네트워크의 중요한 단말이 되는 모습을 보여주어 설득력을 부여한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렇게 만들어진 거대한 네트워크가 일사분란하게 작동하는 모습이 소위 '국뽕' 영화들보다 훨씬 뭉클하며 애국심을 고취시키고야 만다, 우와! 

그러나 랑은 이렇게 훈훈하게 영화를 끝내지 않고 마지막까지 관객에게 역공을 가한다. 영화의 말미에 등장하는 하나의 문서를 통해 패배했다고 생각되는 쪽이 여전히 더 큰 범위에서의 정보 조작을 통해 이 패배를 승리로 탈바꿈시키려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데, 그 시도가 별로 실패할 것 같지도 않아 보인다는 점이다. 결국 우리가 본 것은 훨씬 더 큰 네트워크의 일부에서 벌어진 작은 오작동이었을 뿐이며, 이 배후의 네트워크는 이 오류를 성공적으로 해결해낸 것이 아닌가. 영화 최후의 냉정하고 현실적인 문장을 통해 등골 서늘하게 만드는게, 묘하게 [할복 (切腹, 1962; 코바야시 마사키)]이 떠오르는 지점이다. 근데 이거 아직 노르망디 상륙작전도 벌어지기 전이라 전쟁의 승패조차 불명확한 시기에 만들어진 영환데, 진짜 이래도 되나? 

마지막으로 여담을 하나 하면, 프리츠 랑의 반 나치 스릴러로는 이 영화 이전에 이미 [공포부 (Ministry of Fear, 1944; Fritz Lang)]을 본 바 있다. 이 영화는 처음 미국으로 유학 나오던 시기에 친구가 선물로 주었는데 그 당시에는 랑이 영화에서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인지 밋밋한 영화라는 인상을 받은 기억이 있다. 이제 이 영화를 다시 본다면 어떻게 다가올지 무척이나 궁금하고 또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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