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니는 학교 시네마테크에서 가을 프로그램을 발표했다. 

가장 관심이 가는 건 페드로 알모도바르 '거의' 전작전. 알모도바르의 첫 4작품을 제외하고 1984년 〈내가 뭘 잘못 했길래? (¿Qué he hecho yo para merecer esto?, 1984; Pedro Almodóvar)〉부터 〈훌리에타 (Julieta, 2016; Pedro Almodóvar)〉직전까지의 모든 영화를 매주 일요일 2시에 상영한다. 알모도바르 영화에 대해서 열광하는 것은 아니나 기본적으로 좋아하고 무엇보다 스페인어 상영이니 영어 자막이 필수적으로 달려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든다. 아무래도 학교에서 상영해주는 영화의 주된 언어는 영어이다보니 자막이 달려 있지 않아서 아직도 영어가 미숙한 나로서는 주저하게 마련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그와 맞먹을 정도로 반가운 기획이 11월~12월의 무성 영화 특별전. 에이젠슈타인, 모리스 투르네르, 세실 B. 드밀, 윌리엄 A. 웰먼, 오즈 야스지로가 연출한 무성 영화들을 볼 수 있는데다가 총 6편 중 4편은 라이브 피아노 연주이다. 일단 모두 볼 생각.

프레드릭 와이즈먼의 다큐멘터리 영화에도 관심은 있는데, 2시간반~3시간에 달하는 그의 영화들을 무자막으로 보고 싶지는 않아서... 

마지막으로 스테파니 로스만 감독의 70년대 영화 두 편을 상영하는데, 여성 감독의 착취 영화라는 점에서 흥미가 있고, 자막이 없긴 하지만 70년대 착취 영화에 그런게 그리 중요할까 싶으니 보러 가려고 한다. 어차피 〈터미널 아일랜드 (Terminal Island, 1973; Stephanie Rothman)〉는 블루레이도 Code Red에서 출시되어 자막이 없긴 매한가지고, 나머지 한 편은 아직 디지털 복원도 안되어 있어서 이번이 아니면 볼 기회가 있을까 싶다. 


무성 영화 이야기가 나온 김에, 사실 이 도시의 가장 유서 깊은 극장은 1928년에 문을 열었는데 당시 무성 영화 상영에 쓰던 그랜드 오르간을 아직도 그대로 갖추고 있다. 이 극장에서는 매년 4~5편 가량의 무성 영화를 상영하는데, 이미 본 영화라고 해도 20년대 풍의 고전적인 극장에서 생오르간 반주로 보는 건 또 느낌이 완전히 다르다. 올 하반기 상영작은 〈신입생 (The Freshman, 1925; Harold Lloyd)〉, 〈The Flying Ace (1926; Richad E. Norman)〉이며 내년 상반기에는 무려〈함정 (Mantrap, 1926; Victor Fleming)〉,〈일출 (Sunrise, 1927; F.W. Murnau)〉그리고 〈셜록 주니어 (Sherlock Jr., 1924; Buster Keaton)〉!. 

지난 금요일 오후 10시반에 시카고 근처 로즈몽(Rosemont)에서 호러 컨벤션 행사 Flashback Weekend의 일환으로 상영된 Synapse Films 복원판 〈서스피리아 (Suspiria, 1977; Dario Argento)〉를 보았다. 지난 주말과 이번 주초에 일이 많아 이제서야 글을 남긴다. 이미 많이 논의된 영화라, 그 자체에 대한 리뷰를 쓸 생각은 없고 현장과 복원판에 대한 인상 위주로.

1. 영화관에서 처음 보는 다리오 아르젠토 영화였는데 확실히 그 위력은 대단했다. 

2. 상영 시작 전 Synapse Films의 돈 메이 주니어의 인사말로 시작. 팟캐스트 등에서나 보던 인물을 실제로 보니 나름 반가웠다. 미국 최초의 복원판 상영 (전날 세계 최초 상영은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이루어짐) 임을 알리고, 4K 복원과 4.0 채널 음향에 관한 이야기를 했는데 이미 들었던 내용. 

3. 많은 사람들이 가장 큰 관심을 갖고 있을 화질. 나의 첫 〈서스피리아〉감상이므로 이전의 기억을 더듬어 비교를 할 수는 없다. 복원 상태가 매우 좋다는 생각은 보는 내내 지울 수가 없었고 특히 기숙사 세트의 인공미가 쨍한 색감과 맞물려 더욱 화려해보이는 효과가 있었다. 피부의 창백함이나 붉음이 약간 과도해보인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었는데 전혀 거슬리진 않았고 그냥 지나치게 그 부분을 의식하다보니 나타난 마음의 착각일 가능성도 높다고 생각한다. 

4. 사실 화질 이상으로 Synapse Films 판의 독보적인 특징은 음향이라 생각한다. 이 부분을 특히 강조하고 싶다. 마치 4.0 채널 음향을 과시라도 하듯 영화관의 음량 설정은 너무 오버한다 싶게 큰 편이긴 했다.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목소리는 그리 크다는 인상을 받지 않았기에 그게 제대로 맞춰진 음량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아르젠토 영화는 집에서만 보다보니 감독이 이상적으로 생각한 음량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하기가 힘들다.)

4.0 채널의 위력은 고블린의 그 유명한 주제 음악이 나올 때 극대화된다. (그런데 영화에 이 음악이 좀 많이 나오는가!) 읆조림을 포함한 모든 악기들이 모두 깔끔하게 음 분리가 된 것을 쉽게 인지할 수 있으며 이들이 서라운드 스피커를 통해 최대 볼륨으로 뿜어져 나올 때 느껴지는 거의 주술적이기까지 한 효과는 굉장하다. 영화 장면의 한 가운데로 빠져드는 느낌이랄까. 비록 참고가 될까 하여 유튜브 음원을 링크시켜 두었지만 이렇게 평면적인 사운드로는 도저히 지난 금요일의 극장에서의 몰입도를 재현할 수가 없다.〈서스피리아〉의 감상 '체험'이 몇 배는 강화된다는 느낌을 받았다. 블루레이를 구매하여 감상하시는 분들도 꼭 4.0 채널의 효과를 잘 살릴 수 있는 감상 환경에서 관람하시기를 강력히 추천드리는 이유다.

5. 나는 그동안 이탈리아 영화들은 모두 이탈리아 더빙으로 감상했다. 아무리 해외 개봉을 염두해 두었다고는 해도 일단 1차적으로 이탈리아에서 개봉하기 위해 만들어진 영화들이고 각본도 이탈리아어로 쓰여졌을 터이며, 몇몇 주연을 제외하면 연기하는 배우들 또한 대개 이탈리아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스피리아〉를 보고 최소한 이 영화는 두 가지 이유에서 영어 더빙이 정답이라는 생각이 든다. 첫번째는 제시카 하퍼의 목소리 때문이다. 이미 〈낙원의 유령 (Phantom of the Paradise, 1974; Brian De Palma)〉에서 특유의 저음에 반한 바 있는데, 영어로 이 목소리를 다시 들었을 때의 반가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두번째로 (미국에서 상영했으니 당연하지만) 영어 더빙이기에 자막 없이 감상했기 때문이다. 거의 강박적으로 기하학적인 구도를 만들어 내는 이 영화에서 화면을 설계할 때 고려되지 않은 자막이 떡하니 화면 아랫쪽에 박혀 있었다면 많이 거슬렸을 것이다. 아마 집에서 보았다면 애초에 이탈리아어 더빙을 선택했을 테니 깨닫지 못했을 부분. 어차피 작품 내의 영어는 그리 어렵지 않고 대사를 놓쳐도 영화 감상에 전혀 지장이 없다. 

이 영화는 아르젠토 영화 중에서도 좀 극단적으로 구도에 집착하는 경우지만 앞으로도 영어 더빙이 존재할 경우 무자막 감상을 시도해 보아야 겠다는 생각을 새삼스럽게 해본다.

6. 마지막으로 영화관과 컨벤션의 분위기에 대하여... 다들 공포 영화를 즐기고 〈서스피리아〉를 애호한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좋았는데 우리 부부가 거의 유일한 비(非)백인이라는 느낌에 좀 뜨억했다. 심한 인종 차별을 당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소수자 입장에서는 신기한 구경거리인 마냥 쳐다보고들 가는 경우가 드문드문 있어 민감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컨벤션도 참석할까 했던 계획은 취소했다. 35불이나 내고 들어가야 하는데 그 시선을 계속 신경쓰면서 그러고 싶지 않았다. 좀 복잡한 기분. 

7. 아참, 하나 빼먹었네. 글을 너무 우울하게 마무리하는 것도 맘에 안드니까 상영 전에 얻은 정보 하나. 고블린이 10월~11월에 방미(訪美) 투어를 하며 그 첫 타자가 10월 25일 시카고 상영이다! 작년에 한 존 카펜터 투어를 나중에야 알고 땅을 치고 후회했는데, 이 분들도 연배가 있어 언제까지 활동할지, 다음에 보게 되는게 언제가 될지 모를 일이니 꼭 가야지. 


Twilight Time 할인 행사가 잦다. 소비자 입장에서 좋긴 한데 왠지 모를 불안감도 드는 것이...

어쨌든 이번 행사는 오늘부터 8월 30일 오후 4시 (미 동부 시간 기준)까지 Screen Archives Twilight Time 공식 홈페이지 양쪽에서 진행 중이며 Screen Archives 쪽의 타이틀 목록이 더 다양하다. 

$14.95로 가격이 책정된 타이틀 중 구매하고 싶은게 많은데, 거의 영국의 Powerhouse/Indicator 시리즈랑 겹치는데다가 부록 등은 Indicator 쪽이 낫고 가격도 세금 감면되는 거 감안하면 유의미한 차이 수준은 아니라 아마 구매하지 않을 듯 하다. 일단 Indicator 쪽이랑 부록 면에서 별 차이 없는 타이틀을 조사해보긴 해야할 듯. 

Indicator와 비교해서 대동소이하거나 더 나은 타이틀이 없다면〈슬픔이여 안녕 (Bonjour Tristesse, 1958; Otto Preminger)〉,〈카우보이 (Cowboy, 1958; Delmer Daves)〉, 〈캣 벌루 (Cat Ballou, 1965; Elliot Silverstein)〉정도 구매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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