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팅이 뜸했다. 1월 중순까지 학회에 참석하고 혹한을 피해 겨울 휴가를 다녀오느라 차분히 컴퓨터 앞에 앉아 글을 쓸 시간이 없었다.
파울 페르후번이 세계를 보는 방식을 좋아한다. 나는 그의 영화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명확한 선악관의 부재를 느낀다. 물론 영화 내적으로 통용되는 도덕이 있고 선의를 실현하려는 인물들이 있을 때도 있지만, 페르후번은 여기에 무관심하려 한다. 그는 주로 험난한 세상에서 때로는 살아 남기 위해 악을 쓰고, 때로는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물들에 주목한다. 〈토탈 리콜 (Total Recall, 1990)〉의 퀘이드가 (주1), 〈원초적 본능 (Basic Instinct, 1992)〉의 캐서린이,〈쇼걸 (Showgirl, 1995)〉의 노미가 모두 그러하다. (그런데〈로보캅 (RoboCop, 1987)〉 역시 이런 관점을 볼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이는 주인공을 악당 못지 않은 혹은 그 이상의 악인으로 설정하는 영화들 또는 선악의 고정관념에 충격을 주어 관점을 바꾸면 너의 선도 또 다른 이의 악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영화들과는 분명히 다르다. 구체적인 예를 같은 해에 만들어진〈L.A. 에서 죽고 살기 (To Live and Die in L. A., 1985)〉와 〈살+피 (Flesh+Blood, 1985)〉를 비교하며 들어보고 싶다.〈L.A.에서 죽고 살기〉가 주인공을 비롯한 모든 등장 인물의 '막되먹음'을 보여주고 관객이 동앗줄처럼 부여 잡는 (상식과 관습에 기반한) 기대를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철저하게 배신하여 그들을 충격에 빠뜨린다면, 〈살+피〉에서 페르후번은 그런 전복에 애당초 관심이 없으며 관객이 그의 영화 세계에서 그런 기대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영화 초반부터 적나라하게 보여준 후 자유롭게 도덕관이 부재하는 세상을 그려간다. 관점의 차이 때문인지,〈L.A.에서 죽고 살기〉의 등장 인물들이 기본적으로 악인들로 규정될 수 있는 것과는 달리〈살+피〉의 인물들은 악을 표상한다기 보다는 동물적 생존 본능과 욕망에 충실한 이들로 느껴진다.
지금까지 길게 설명한 페르후번 식의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은 영화적으로 뚜렷한 장점을 지닌다. 선악과 달리 욕망(들)은 그 방향이 자유로우며 시시각각 변화한다. 그리고 욕망(들)이 이끄는 그의 인물은 어느 하나의 정체성으로 국한되지 않은 채 해석되지 않는 모호함을 지닌다. 그리고 이 모호함은 서스펜스를 낳는다. 관객으로서는 도무지 이 인물들이 무슨 행동을 할 것이며 언제 본색을 드러낼지 예측할 수가 없다. 비유하자면, 1인칭으로 어두컴컴한 건물을 헤매는 공포 영화의 한 장면인데 현재 나의 시점이 피해자의 것인지 살인마의 것인지가 불분명하다고 할까? 두 경우에 대비해야 하는 공포의 유형이 엄연히 다를진데, 그 어느 쪽이 발현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혼란스럽다. 게다가 이 감독은 그에 대한 답을 주는데 관심이 없다! 오히려 답을 끝끝내 내리지 않고 영화가 끝난 후까지 이어지는 서스펜스를 만들어 내는데 공을 들이는 것처럼 보인다.
게다가 일단 선악관을 삭제한 페르후번 식의 세계가 감독의 '주제 의식'을 담아내는 것은 어렵다. 신(神)으로의 감독이 우연적인 사건들을 통해 인물들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 가려고 해도 금기가 없는 페르후번의 인물들이 어디로 튈지 예측하기가 어려워진다. 페르후번의 미덕은 '주제 의식'이 흐려지는 한이 있어도 일단 인물들에게 부여한 자유를 회수하려 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의 영화를 보고 "도대체 뭘 말하고 싶은지 모르겠다"고 불평하는 관객들이 충분히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 그런데 어찌하랴, 페르후번의 영화에서 빛나는 부분은 주제가 아니라 그가 구축한 세계 안에서 인물들이 움직이는 방식, 그리고 개입을 극도로 자제하며 그것을 담아내는 시선인 것을.
페르후번의 인터뷰를 보면, 그는 줄곧 현실을 담아내는, 사실주의적인 영화를 찍고 싶어함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그의 영화는 '가르침'을 주려는 영화들, 도식에 의거하는 영화들보다 훨씬 풍요롭다. 여기서 페르후번의 감독으로의 역량이 발휘된다. 불확실성으로 가득찬 영화가 반드시 다채롭고 풍요로운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산만하기 쉽상이다. 페르후번의 영화에 드러나는 모호함을 그의 방만함으로 착각해서는 안된다. 모호함이 차가운 긴장감을 가진 밀도있는 하나의 작품으로 탄생하는 것은 겉으로 나서지 않은 채로 치밀한 설계 속에 모호함을 배치해가는 감독의 솜씨 때문이다.
여기까지 쓰고 나면 사실〈그녀 (Elle, 2016)〉에 대해서는 이 영화가 페르후번의 작품에 일관되게 드러나는 이런 경향의 한 정점으로까지 느껴진다는 언급 외에 딱히 덧붙일 말이 없다. 특히 이 영화는 주인공이 갖는 모호함을 영화 전체의 모호함으로까지 확장했다는 점이 대단하다. 사실 페르후번은 이전에도 서사에 모호함을 부여하려는 시도를 꾸준히 해왔지만, 두 가지 답 중 하나를 고르면 모호함이 사라지거나 (〈토탈 리콜〉) 결과적으로 한쪽 해답에 힘을 실어주는 (〈원초적 본능〉) 등 아쉬움을 남겼다. 페르후번은 〈그녀〉에서 영리한 방법으로 이를 돌파한다: 주인공 정체성의 핵심을 결정짓는 어느 사건에 대한 설명을 오로지 주인공 미쉘 자신의 진술과 사건을 다룬 TV 다큐멘터리, 그리고 다른 인물의 (명확히 해석되기 힘든) 반응에만 의존한다. 미쉘의 진술은 얼마나 신뢰가 가능한가? 100%? 0%? 아니면 그 중간의 어딘가? 모 아니면 도 식의 해답이 존재하는〈토탈 리콜〉과 달리 서사 자체가 모호함을 획득하는 순간이다.
이제 이자벨 위페르에 대해 말할 때이다. 페르후번의 영화는 극도로 정교하다. 따라서 모호함 역시 인위적으로 계획된 눈속임으로 느껴질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고 영화 자체를 방만하게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다. 페르후번은 배우의 장기에 의존하는 방식으로 이 난제를 돌파해낸다. 비단 배우의 연기력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페르후번은 배우의 외모, 발성, 표현력 등에서 오는 이미지를 적극 활용하는데 매우 능하다. 그가 룻거 하우어나 아놀드 슈워제네거, 낸시 앨런과 샤론 스톤을 활용하는 방식을 떠올려 보라.
그런데 페르후번의 영화에 생존 본능과 다채로운 욕망들, 그리고 선악의 모호함에서 오는 풍요로움을 완벽하게 체화한 배우가 나타나 페르후번의 치밀함을 넘어설 때, 그의 영화 최고의 순간들이 나타난다. 나는 지금까지 보아온 페르후번의 영화에서 그 경지에 오른 배우를 두 번 만났다. 〈살+피〉의 제니퍼 제이슨 리와 〈그녀〉의 이자벨 위페르가 그들이다.
(주1) 토탈 리콜 프로그램 자체가 퀘이드의 욕망을 순수하고 집약적인 형태로 구현하기 위한 가상 현실이며, 중후반의 내용이 퀘이드가 토탈 리콜 사에서 고백한 욕망들을 답습하는 한, 여전히 토탈 리콜 프로그램 속인지 아니면 실제 현실인지 여부와 무관하게 이는 욕망의 현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