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소니 만의 중후기 서부극과 에픽은 제법 보았으나, 그의 필름 느와르는 보지 못했다. 

그런데 신생 회사 (라기보다는 블루 레이/DVD 렌탈 회사인데 최근 블루 레이 제작 사업에도 뛰어든) ClassicFlix에서 기존에 발매하기로 한 두 작품에 이어 새로운 여섯 작품을 발표했는데, 앤소니 만의 필름 느와르가 두 작품이나 포함되어 있다. (〈T-Men, (1947)〉,〈Raw Deal (1948)〉) 게다가 발표문에 따르면 곧 또 하나의 앤소니 만 감독/존 알톤 촬영감독의 작품을 발표 한다니 기쁘지 않을 수 없다. ( 간단히 검색해보니 두 사람이 함께 만든 작품은〈Border Incident (1949)〉, 〈Reign of Terror (1949)〉,〈Devil's Doorway (1950)〉그리고 만이 일부 관여한 〈He Walked by Night (1948)〉이다.)


문제는 현재 예약 주문 받고 있는 타이틀 가격이 만만치 않다는 점인데, 할인 가능성 같은 건 조금 더 지켜봐야 알게 되겠지.

〈로건 (Logan, 2017)〉개봉을 맞아 미루어 두었던 같은 감독의〈나잇 앤 데이 (Knight and Day, 2010)〉를 보았다. 와, 이거 재밌는데? 


제임스 맨골드의 영화는 지인이 선물해 준 〈캅 랜드 (Cop Land, 1997)〉, 한국 가는 비행기에서 본 〈울버린 (The Wolverine, 2013)〉에 이어 세 번째로 보는데, 뭐니뭐니해도 〈캅 랜드〉가 으뜸이지만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신나게 즐길 수 있는 영화들이었다. 이 사람의 액션 연출과 영화 흐름의 완급 조절은 이제 신뢰가 간다.


이쯤되니 원작을 워낙 좋아해서 피하고 있었던 〈3시 10분 유마행 (3:10 to Yuma, 2007)〉도 보고 싶은 걸? 원작과는 많이 다르겠지만 왠지 어떻게 이 인물들을 다루었을지 짐작 가기도 하고 그게 기대 되는 부분이 있다. 그리고 맨골드의 영화라면 빼어난 한 장면 정도는 있을테고 그거면 2시간을 기꺼이 투자할 수 있지.


〈로건〉은 〈캅 랜드〉와 정서적으로 비슷한 구석이 있을 법도 한데, 맨골드의 강점이 잘 드러나는 영화면 좋겠다. 


'흑인을 습격하는 개' (이렇게 훈련된 개를 백견(White Dog)이라 부른다 한다) 라는 것 외에 어떤 정보도 읽지 않고 보았다. 초반에는 백견으로 키워진 개와 이 개의 배경을 모른채 우연히 돌보게 된 백인 여성과의 관계를 그린 영화인 줄 알았으나, 영화가 중반에 이르러 개가 백견임이 드러난 후 비로소 두 고집불통 전문가의 대결을 다룬 영화임을 알아 차렸다. 그 둘이란 백견에게서 흑인에 대한 공격성을 제거할 수 있음을 증명하고 싶은 흑인 조련사 키스 (Keys)와 강력하고 영리한 백견이다. 


새뮤얼 풀러의 영화답게 그들의 대결은 극한으로 치닫는다. 시작부터 풀러는 그들에게 퇴로를 허용하지 않는다. 키스는 보호구를 입은채로 철창에 들어가 백견을 도발하고 사투를 벌인다. 흑인을 공격해봐야 효과가 없음을 인식시키기 위함이다. 물론 동물 전문가인 스턴트맨이 보호구 속에 들어가 있는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그들의 격투는 관객을 소스라치게 한다. 〈으르렁! (Roar!, 1981)〉처럼 사자가 무리지어 나와 인간을 향해 달려드는 수준은 아니지만 동물이 드러내는 적의의 수준과 공격의 맹렬함은 그보다 훨씬 강력하다. 그리고 이런 몸뚱이의 부딪힘은 무성영화스러운 면모를 갖추고 있어 백견과 키스 모두 만만치 않음을, 그리고 키스가 얼마나 흔들림없는 의지와 전문성을 갖고 있는가를 백마디 말보다 더 효과적으로 보여주며 묘한 영화적 희열까지 불러 일으킨다. 


여기까지만 보면 선량하지만 굳건한 흑인 전문가가 어려움 끝에 백견을 치유하는 이야기로 볼 수도 있겠으나 영화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훈련 도중에 백견이 탈주하여 흑인을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화면에서 보여주지는 않으나 키스는 그 사건을 적극적 (현장의 증거 인멸) 혹은 소극적 (백견이 범죄를 저질렀음을 경찰에 신고하지 않고 보호하여 데려옴)으로 범죄를 은폐한 후 백견을 조련소로 데려온다. 모두가, 심지어 백견의 가장 큰 옹호자로 보였던 백인 여성마저, 도저히 이 위험한 개를 살려두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할 때 키스는 기어코 이 살인견을 고치려고 한다. 개를 안락사시키는 것이 선이라고 하긴 어려우나, 더 이상 키스를 선(善)의 집행자 혹은 흑인의 대변자로 바라보기는 어렵다. '대체 개를 고치고 나면 어쩌려고 저러나?' 라는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키스는 백견과의 대결 외의 어떤 일도 신경쓰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로버트 알드리치의 많은 영화들이 어떤 배경에서 출발하건 도덕을 초월한 두 카리스마 넘치는 전문가들의 필사적인 대결로 수렴하는 것처럼, 〈백견〉에서도 더이상 윤리적 문제나 흑백 갈등이라는 소재는 중요치 않게 느껴졌다. 


물론 풀러는 흑백 문제라는 소재를 낭비할만큼 녹록한 감독은 아니다. 그것을 억지로 강조하여 감동이나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관심이 없을 뿐이다. 그는 이 민감한 문제를 작품 내의 긴장을 고조시키는데 사용한다. 키스는 백견의 재훈련 과정이 잘못 진행되면 공격성을 억누르지 못한 개가 역으로 백인을 공격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이는 '감동'을 주려는 영화들과 달리 재훈련 과정이 진행되어도 서스펜스를 유지시키는데 큰 공헌을 한다: 백인을 향해 달려드는 개는 공격성을 드러내는 것인지 반가움에 겨워하는 것인지 알 수 없게 한다. 비록 지나치게 (개가 사람에게 달려드는) 비슷한 상황을 반복적으로 활용한다는 생각은 들지만 그게 치명적인 단점으로 여겨지진 않는다. 


이런 영화가 풀러의 헐리우드 커리어를 작살내고 흥행에 참패했다는 사실이 놀랍다. 나에게는 이 인정사정없고 긴장감 넘치는 영화가 도덕적인 메시지를 당위적으로 설교하는 영화들보다 민감한 소재를 훨씬 풍요롭게 다루고 있으며 생각할 거리를 준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정말 멋진 장면 하나를 언급하며 글을 마무리 하고 싶다. 탈주한 백견이 배고픔에 겨워 쓰레기통을 뒤지는 모습을 보여주다가 카메라가 갑자기 수평이동을 하여 모퉁이 맞은 편에 풍선을 들고 걸음마를 하는 흑인 아기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 영화에서 최초로 무력하기 그지 없는 아기가 등장하는 부분이다.) 프레임에 아기가 들어오는 순간 성인 남성도 당해내기 힘든 백견과의 조우를 예견하여 손에 땀을 쥐게 하다가 (게다가 감독이 감독인데 아기에게 대체 무슨 일이 벌이지겠나!) 마치 관객을 놀리듯 간신히 아기와 백견이 엇갈리는 찰나가 지나간다. 그러나 풀러는 이렇게 쉽게 관객을 놓아줄 생각이 조금도 없다. 다음 장면에서는 백견과 마주친 행인의 구두만을 보여주는데 도무지 이 사람의 피부색을 보여주려 하질 않는다. 그후 카메라는 천천히 수직 이동을 하며 관객의 애를 태우다가 갑자기 극도의 폭력 행위를 담아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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