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리] 한정판을 애로우 홈페이지에서 주문한 것은 2017년 12월 15일의 일이다. 12월 11일 발매된 [캐리]는 명불허전의 인기를 자랑했고 순식간에 품절되어 찾을 수가 없었는데 마침 새로 오픈한 애로우 홈페이지에 Limited Availability 상태로 주문이 가능했고 나는 속는 셈치고 주문을 넣었다.

당시에 함께 주문한 다른 타이틀들만 배송이 되어 반쯤 포기하고 있었지만 애로우 측에서 따로 나에게 주문 취소에 관해 연락하는 일도 없어 기다려보자는 심산으로 1년이 넘게 주문을 방치하고 있었다. 당연히 애로우 측의 주문 관리 능력에 대해서는 적잖이 실망한 상태. 

지난 여성의 날인 3월 8일, 애로우는 디어볼릭 매거진의 최고편집자 캣 엘린저가 기고한 애로우 비디오의 10명의 주연 여배우에 관한 글을 뉴스레터로 보냈고, 그 글을 즐거이 읽던 중 시시 스페이섹이 등장하자 (심지어 메일의 제목도 캐리에서 커피까지 였으니!) 까맣게 잊고 있었던 [캐리] 한정판이 떠올랐다. 

3월 12일, 나는 애로우 측에 주문에 대해 문의하고 [캐리] 한정판을 구할 아주 작은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주문을 유지했으면 좋겠지만 아니라면 환불해달라는 메일을 보냈다. 그리고 3월 15일, 애로우 측에서 기대조차 안했던 내용의 답변을 보냈다. 

"물류 센터 측과 연락해보니 이 주문은 2017년 12월에 이미 재고부족으로 취소했다는데, 우리는 통지를 받지 못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고맙게도, 아직 제한된 수량의 보관용 제품들이 남아 있음을 발견했고, 최대한 빨리 한 부 배송하도록 하겠습니다." 

오 마이 갓! 그리고 오늘 나는 드디어 [캐리] 한정판을 손에 넣었다. 조삼모사같긴 하지만 애로우 비디오 만세!!!!!!   

여담인데, 공교롭게도 내가 메일을 받은 날, 디아볼릭 DVD는 "1년 넘게 품절되었다고 한 인기 타이틀의 재고가 소량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는 글을 올렸다. 나는 아마 [캐리]가 아닐까 추측하는데 두고 볼 일이다. 

이건 정말 기대 안했던 일인데, 세르게이 본다르추크의 [전쟁과 평화] 복원판을 우리 동네에서 극장 상영 해준다고 한다! 재미있는 영화인지는 보기 전에 알 길이 없지만, 실제로 촬영된 대규모 전쟁/군중 장면이나 호화찬란한 귀족 사회 장면을 무척 좋아하니 그걸 큰 화면으로 보는 것만으로 돈값을 다하지 않을까. 스틸컷이나 영상만 보면 이런 영화를 공산주의 소련에서 제작했다는 게 아이러니컬하다. 

원작은 학부 시절에 여름방학에 '러시아 문학의 이해'를 수강하며 어마어마한 분량의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 작품들을 독파해나갈 때 읽었는데 10년도 더 지난 일인데다가 워낙 방대하여 지금은 구체적인 내용은 하나도 기억이 안난다. 

원래 4부작으로 제작된 영화답게 총 네 편으로 나누어 튼다는데 마침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이라 천재일우의 기회가 아닌가 싶다. 

 

 

https://www.siff.net/year-round-cinema/war-and-peace

4k 감상 환경을 임시적으로나마 완성한 걸 기념하여 지난 주말 [쉰들러 리스트] UHD Blu-ray를 보았다. 이 디스크는 Dolby Atmos 음향도 지원하지만 이쪽이야말로 내 집을 확보하기 전까지는 언감생심이기 때문에, 내가 기대한 것은 영화 자체만큼이나 4k HDR 화질. 특히 4k의 경우 블랙의 암부 디테일에 큰 강점이 있기 때문에 흑백으로 촬영된 [쉰들러 리스트]에서 얼마나 위력을 발휘할지 확인하고 싶었다.

나는 스필버그에 호감을 품는 것이 무척 늦었고-그렇다고 스필버그를 싫어한 것은 아니고 아예 관심을 크게 두지 않았다- 예외는 있지만 '사명감으로 만든 영화'을 거북해하는 편이라 아직도 [쉰들러 리스트]를 보지 않고 있었다. 확실히 "이 시계면 몇 명을 더 살릴 수 있었는데" 같은 대사들은 여전히 보고 있기가 좀 힘들다. 하지만 [쉰들러 리스트]는 사명감으로 만든 영화 이상으로 스펙터클의 영화라고 느꼈다. 스펙터클을 만들고 효과적으로 활용하는데 있어 스필버그는 둘째가라면 서러운데, [쉰들러 리스트]는 마치 그 절정처럼 느껴졌다. 영화 전체가 빽빽한 스펙터클의 숲처럼, 굉장한 규모와 밀도를 자랑하는 장면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데 그 스펙터클의 박력과 리듬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이 영화는 관객의 공감을 호소하여 눈물을 자아내는 영화라기보다는 관객을 그 자리로 데려가 질식시키는 영화가 아닌가. 보고 있노라면 이렇게나 돈과 시간과 노력을 들였을 장면들이 순식간에 넘어간다는게 아까워지는 순간들이 가득한데, 어쩌면 스필버그의 '사명감'이 이토록 전례없는 스펙터클의 근원이었으리라 짐작해본다. 그렇게 생각하니 다른 누구도 아닌 스필버그가 이 영화를 만들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이렇게 말하면 선전 영화 마냥 스펙터클을 이데올로기를 뒷받침하는 수단으로 활용한 게 아닌가 싶은데 -아니라고 부정하기도 어렵다- 장면들의 박력이 워낙 막강하여 보고 있는 순간에는 역설적으로 서사에서 차지하는 맥락을 잊고 말았다. 

게다가 이 영화는 감독의 결단이라는 측면에서 끝내주게 흥미롭다. 흑백 화면 속의 "빨간" 코트의 소녀 같은 건 물론이거니와 쉰들러의 묘를 참배하는 장면도 -영화의 마지막에 그런 장면을 넣으면 에너지가 특정 방향으로 쏠리는 기분이라 그 의의나 필요성을 떠나 나한테는 그리 달갑지 않은 장면이었음에도- 카메라로 참배객 한명 한명의 표정을 끈기있게 마지막까지 잡아내는 패기와 집요함 같은 건 예사롭지가 않고. '시류에 영합하던 처세꾼이 비극을 외면하지 못하고 각성한다'는 대단히 보편적이고 호소력있는 플롯에도 그리 집착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고 (영화는 놀라울 정도로 쉰들러의 개인사에 관심이 없는 느낌이다), 나치 장교 아몬 괴트에게 엄청난 비중을 할애하는 중반부에서는 그 대담함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왜냐하면 비판하고 싶은 인물-스필버그가 아몬 괴트를 비판하고 싶은지는 차치하고-에게 그의 시점을 부여하는 순간 관객은 귀신같이 거기에 공감대를 형성하고 말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겐 괴트가 차지하는 스크린 비중 자체가 보고 있는 내내 엄청난 서스펜스였다. 게다가 괴트가 유대인 노인을 즉결 처형하려고 시도하는데 계속해서 권총이 불발나는 장면을 서스펜스로 활용하는 장면 같은 건 더 큰 논란이 된 아우슈비츠 가스실 서스펜스 장면 이상으로 정말 이래도 되나 싶은데, 그래서 눈을 뗄 수가 없다. (여담으로, 아내는 2시간이 넘어가는 영화라면 중간에 잠깐 인터미션을 갖는 걸 좋아하는데,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멈추지 않고 보고 나서 영화가 매우 짧게 느껴져 놀랐다고 했다.) 

UHD로 보는 첫 영화가 [쉰들러 리스트]인 건 대단한 행운이다. 스펙터클한 군중 장면의 디테일이 살아나면서 화면의 밀도를 더하고, 괴트와 헬렌이 지하실에서 대면하는 장면이나 쉰들러가 아우슈비츠의 간수를 매수하는 장면 등 암부가 많은 장면에서 그들의 아주 미약한 표정 변화나 얼굴의 주름같은 디테일이 어둠에 완전히 묻히지 않고 살아나 보는 내내 감탄을 금치 못했다. 블루레이와의 체감 화질 차이는 굳이 체크해보지 않아 알 수 없으나 이전에 다른 흑백 영화들을 본 기억에 미루어보면 검은색 표현력이 급상승하는 HDR은 컬러 이상으로 흑백 영화에서 그 위력을 발휘하는게 아닐지? 

이제 스필버그의 다른 영화들을 4k로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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