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한달간은 졸업과 이사를 동시에 진행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장거리 이사와 미국 업체의 느린 서비스 속도 때문에 여전히 이삿집은 도착하지 않았지만 이제 '홈시어터와 그와 연계된 결정을 제외한' 가구 셋업은 대충 마무리된 상태. 어차피 이삿집이라고 해봐야 절반은 블루레이고 나머지는 다 버리고 왔으니 IKEA 등에서 새로 사면 그만이라. 

5년반 동안 유지하던 홈시어터 기기 역시 죄다 중고로 팔아버렸다. 아무래도 5년 동안 쓰다보니 화질와 음질 양쪽 측면에서 여러가지 불만족스러운 점이 느껴졌기 때문. 그래서 홈시어터를 제로부터 새로 구축해야했다. 홈시어터라고 하면 크게 네가지 항목으로 나누어볼 수 있겠다. 

첫째, 블루레이/스트리밍 재생 기기
둘째, 오디오 기기 (리시버 포함)
셋째, 비디오 기기 (프로젝터 및 스크린, 또는 TV)
넷째, 의자 

홈시어터를 설치하는데 고려한 (하고 있는) 상황과 제약은 다음과 같다.

첫째, 소음 문제: 과거 아파트는 1층에 카펫 바닥이어서 층간 소음 우려가 없었는데, 이번 아파트는 16층에 마루 바닥이라 층간 소음을 고려해야 한다. 특히 서브우퍼가 골치아픈데 진동을 어떻게 방지할 것인가. 

둘째, 투사 거리와 프로젝터 설치 문제: 거실이 넓어 투사 거리는 충분히 확보가 되는 점은 다행이지만 (1) 스크린이 설치될 벽 맞은 편이 큰 통유리 창이라서 책장 또는 높은 스탠드를 이용한 설치는 불가능 (2) 거실에 기둥이 하나 있어서 의자 배치에 제약이 따르기 때문에 낮은 스탠드 혹은 바닥에 프로젝터를 놓으려면 의자가 투사각 밖에 있도록 계산을 정교하게 해야 함, 또한 낮은 스탠드나 바닥에 프로젝터를 놓으면 항상 건드려서 재조정 해야할 위험이 있음 (3) 천장 설치는 렌트하는 집이라 허락 받기가 쉽지 않고 설령 허가를 받더라도 집을 비울 때 메우고 간다고 해도 트집 잡힐 가능성이 있으며 (4) 봉 설치는 한국과 달리 널리 보급되지 않아 제반 장비를 직접 제작할게 아니라면 한국에서 배송시켜야 하는데 비용이 만만치 않고, 자가 설치의 경우 10kg 이상 무거운 프로젝터라면 불안함이 있음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 

셋째, 스크린 크기는 얼마로 할 것인가? 프로젝터 고민이 필요없는 80인치 이상급의 OLED/QLED TV를 구매하는 것은 어떤가?

넷째, 예전 블루레이 플레이어/리시버는 4k 소스와 3d 지원을 제공하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이 두 가지 요소를 얼마나 고려할 것인가? 

다섯째, 의자는 어떤 것을 골라야 하나? 일반 의자? 소파? 리클라이닝 체어? => 이 부분은 아내에게 위임하기로 했다. 

가장 쉽게 고른 것은 블루레이 플레이어였다. 지역 코드 때문에 블루레이 플레이어 2개를 동시에 운용하니 불편함이 커서 이번에는 리전프리 플레이어를 구매하기로 했고 4k 지원이 되는 플레이어를 사기로 결심하다보니 JustTheDisc 팟캐스트에서도 거론된 220-Electronics가 거의 유일한 대안으로 떠올랐다. 참고로 이 사이트에서는 리전프리를 하는 대신 일반적인 블루레이 플레이어 가격보다 훨씬 더 비싸게 판매하기 때문에 리전 B 재생 기능이 필요없다면 굳이 이쪽에서 구매할 필요는 없다.

리처드 브룩스는 비범한 연출가인가? 성실하고 뚝심있지만 연출가로 비범하다고 보긴 힘들다.
리처드 브룩스는 끝내주는 이야기꾼인가? 그렇고 말고.

나는 리처드 브룩스의 영화들이 과소평가 받고 있다고 생각하며, 더 언급될 필요가 있다고 믿는다. 영화미학적인 관점에서 바라볼 때 흥미를 가질 감독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내가 본 모든 영화에서 브룩스는 한결같이 매력적인 인물들을 만들고, 자기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숨기는 법이 없으면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굉장한 흡입력으로 대단히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뭘 더 바랄쏘냐. 


캔자스 주의 일가족 네 명을 잔혹하게 살해한 두 명의 전과자에 대한 트루먼 카포티의 유명한 "non-fiction novel"을 영상화한 [냉혈한 (In Cold Blood, 1967)]에서 브룩스가 택한 몇 가지 결정이 재미있다. 첫째, (브룩스와 가까운 사이이기도 했던) 트루먼 카포티는 각본을 보거나 촬영에 관여할 수 없다. 다만, 브룩스가 각본 작업에 착수하기 전에 카포티가 언급해두고 싶은 부분들을 미리 브룩스와 이야기할 수는 있다. 둘째, 주인공인 두 명의 전과자 역할로 유명 배우를 캐스팅하지 않는다. 자본을 댄 컬럼비아 영화사 측에서는 폴 뉴먼과 스티브 맥퀸을 섭외했으나, 브룩스가 거절했다. 훗날 브룩스가 프랑스 TV와의 인터뷰에서 말하길, 컬럼비아 영화사 측에 "세찬 바람이 몰아치는 한밤중, 외딴 농가에 누가 찾아와 문을 두드려 파자마 차림으로 문을 열었는데 폴 뉴먼의 얼굴이 있으면 '아이고, 폴, 어서 들어와 커피 한 잔 하지 그래요?'라고 하겠지만, 낯선 얼굴이라면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갑자기 두렵겠죠. 그게 이 영화에 필요한 겁니다."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셋째, 스크린에 카포티의 문체를 구현하여 현장감을 부여할 수 없으니 가능한 한 실제 사건이 벌어진 로케이션에서 사건과 관계된 사람들을 캐스팅하여 찍는 방식으로 이를 추구한다. 놀랍게도 주인공들이 범죄 전에 들르는 상점, 주유소, 범죄 후에 들르는 양복점, 가전 가게, 이후의 법정까지 모조리 실제 사건이 벌어진 공간들이며 영화에 등장한 농가가 촬영 7년전의 살인 현장이라는 사실은 섬뜩하기까지 하다. 심지어 실제로 범인들을 상대한 양복점 점원이나 재판에 참여한 배심원들을 그 역할에 그대로 캐스팅했다. 브룩스의 말에 따르면 비교적 연기 경력이 짧았던 두 주인공 배우가 역할에 몰입하게 하는데에는 실제 로케이션(특히 살인이 벌어진 집)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이런 종류의 무용담에 가까운 이야기들이 영화의 훌륭함을 담보하는 건 결코 아니다. 하지만 [냉혈한]은 [엘머 갠트리 (Elmer Gantry, 1960)]와 더불어 내가 본 네 편의 리처드 브룩스 영화 중에서도 각별히 빼어나다고 생각한다. (오해가 없으시길. 내가 본 나머지 두 편인 [프로들 (The Porfessionals, 1966)]과 [총알을 물어라 (Bite the Bullet, 1975)]도 대단히 훌륭하다.) 그리고 내가 [냉혈한]에 애정을 느끼는 이유는 이 영화의 훌륭함이 리처드 브룩스의 오뙤르로의 역량에서 기인하는게 아니라 일종의 고전기 스튜디오식 협업을 통해 달성되기 때문이다. [엘머 갠트리]와 [냉혈한]은 각각 존 알튼과 콘라드 홀이라는 굉장한 촬영 감독과 함께 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엘머 갠트리]를 존 알튼의 대표작으로 꼽기엔 무리가 있지만, [냉혈한의 콘라드 홀은 2시간 15분 내내 흑백 화면에서 빛과 그림자를 가지고 날뛰며 그의 진수를 마음껏 보여준다. 촬영감독 뿐만이 아니다. 원작자 트루먼 카포티는 말할 것도 없고 (리처드 브룩스는 검증된 원작을 각색할 때 빛나는 감독이기도 하다), 편집의 피터 진너, 음악의 퀸시 존스까지 이만한 스태프가 모인게 놀라울 정도. 애초에 각본가로 출발했고 대개 각본을 스스로 담당하곤 하는 브룩스 본인의 이야기꾼으로의 재능에 (윗 문단에서 언급한 선택들 역시 과시적이거나 작가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브룩스가 이 이야기는 스크린에서는 이런 방식으로 전달해야 효율적이라는 이야기꾼으로의 본능에 따라 선택한 결과물이 아닐까) 이 스태프들이 참여한 결과는 놀랍다. 

크라이테리언 사의 블루레이가 각별한 이유는 어마어마한 양의 부록을 넣어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부록들이 관람자들이 알고 싶어할 내용을 콕 짚어주기 때문이기도 하다: 리처드 브룩스 책을 쓴 작가의 리처드 브룩스에 대한 인터뷰, 촬영감독 존 베일리의 콘라드 홀에 대한 인터뷰, 피터 진너에 대한 인터뷰, 퀸시 존스에 대한 인터뷰, (위에 언급한 프랑스 TV와의) 브룩스 본인의 인터뷰, 여기에 트루먼 카포티에 대한 세 편의 영상. [냉혈한]을 좋아하고 이 영화의 미덕이 어디에서 오는지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사람들이 준비한 부록이다. 


2018년에는 총 284편의 영화를 보았고, 이중 처음 본 영화는 총 263편이었다. 284편 중 블루레이로 본 영화가 221편, 극장에서 본 영화가 43편, 스트리밍으로 본 영화가 19편, DVD로 본 영화가 1편이었다. 블루레이 레이블 중에는 Arrow 37편, Criterion 32편, Powerhouse 17편, Shout! Factory 13편, Warner Archive 10편 순으로 많이 보았다. 올해 처음 구독을 시작한 dvdnetflix를 통해 대여해 본 영화가 34편이라는 사실도 언급해둔다. 

어떤 식으로 영화를 결산할지 항상 고민된다. 덕분에 작년엔 결국 제대로 된 결산은 하지 못했다. 일전에 어딘가 쓴 적이 있는데 비록 78%의 영화를 물리 매체로 감상했지만 여전히 물리 매체를 완벽히 즐기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리고 대체로 할인 행사를 기다렸다가 구매하기 때문에 '올해의 타이틀' 같은 걸 꼽기도 민망하다. 그렇다면 '가장 좋았던 영화'를 꼽는게 제일 그럴 듯 하다 싶지만 '가장 좋았던'의 기준이 너무 애매해서 보다 명확한 주제 하에 목록을 정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뭔가 흡족한 포맷이 나올 때까지 매년 새로운 걸 시도해보지 않을까 싶은데, 올해는 내맘대로 이런저런 주제로 영화들을 겹치지 않게 꼽아 보았다. 선정 후보는 letterboxd 기준 2016년까지 출시된 영화들 중 2018년에 처음으로 본 영화들. 

올해의 배우

마를레네 디트리히! 올해의 박스세트로도 꼽고 싶은 Criterion의 [Dietrich & von Sternberg in Hollywood]에 수록된 모든 영화를 꼽고 싶다. 폰 스턴버그를 무시하는 건 절대 아니지만, 디트리히 없이 성립하기 어려운 영화들이기 때문에 어느 하라를 뺄 수가 없다. 스크린 속 디트리히에게는 기이하고 매혹적인 아우라가 있어서, '열연'한다는 느낌이 전혀 없는데도 캬바레 가수던, 스파이던, 여황제던 무슨 역할을 맡더라도 좌중을 장악하는 존재감을 뿜어낸다. [금발의 비너스 (Blonde Venus, 1932)]같은 영화는 정신머리 없는 뒤죽박죽 플롯에 영화의 배경과 인물의 사회적 위치가 계속 바뀜에도 디트리히의 존재만으로 이를 모조리 납득시킨다. 굳이 따지자면 [불명예 (Dishonored, 1931)]와 [진홍의 여제 (The Scarlet Empress, 1934)]를 제일 좋아하는데, [모로코 (Morocco, 1930)]도 [상하이 특급 (Shanghai Express, 1932)]도 [금발의 비너스]도 놓치기 아깝다. 

올해의 감독

마이클 파웰. 많은 영화를 함께 한 프레스버거를 무시하는 건 아닌데, 올해 본 영화들 중 가장 훌륭한 방식으로 끝맺은 걸작 [피핑 톰 (Peeping Tom, 1960)]을 빼놓을 수가 없어서. [삶과 죽음의 문제 (A Matter of Life and Death, 1946)]와 [흑수선 (Black Narcissus, 1947)]을 통해 비로소 파웰&프레스버거 영화들을 진심으로 애호하게 되었다. 

올해의 순간

[건 크레이지 (Gun Crazy, 1950; 조셉 H. 루이스)]. 잊을 수 없는 장면이 많지만, 내가 꼽고 싶은 건 경찰의 추적을 피해 헤어지려다가 서로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바로 그 순간! 나는 도주극 영화들을 볼 때 인물들과 거리를 한참 두게 되어 감흥이 떨어지는 문제를 겪곤 하는데, [건 크레이지]는 여태껏 본 도주극 영화 중 첫번째로 꼽고 싶을 정도로 대단히 만족스러웠고, 그건 두 인물의 관계를 그려내는 방식이 대단히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올해의 노래


살인 장면의 기교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는 지알로에서도 주인공도 아니고 희생자1의 죽음에 이토록 마음이 움직일 수 있다. [새끼 오리를 고문하지 마라 (Non si sevizia un paperino, 1972; 루치오 풀치)]는 풀치가 단순히 고어한 장면을 잘 연출하는 감독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영화다. 영화 내내 링크한 노래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데, 이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도저히 잊을 수 없다. 

올해의 WTF

좋은 의미의 WTF. 뭐니뭐니해도 [리퀴드 스카이 (Liquid Sky, 1982; Slava Tsukerman)]다. [광란의 사랑 (Wild at Heart, 1990; 데이비드 린치)]나 [Heart of Midnight, 1988; 매튜 채프먼)]도 만만치 않은 WTF인데, [리퀴드 스카이]는 막나가는 전개인 주제에 얄미울만치 야무지게 챙길 거 다 챙겨먹고 등장 인물의 운명과 선택이 애절하고 아련하기까지 해서. (나머지 두 영화가 그렇지 않다는 건 또 아닙니다.)

올해의 공포 영화

[그것이 따라온다 (It Follows, 2014; 데이빗 로버트 미첼)], 이렇게 끈끈하고 의리있는 인물들이 나오는 공포 영화라니! 시네마스코프를 활용하는 방법도, 음악도 다 좋았는데, 인물들에 대한 호감 덕분에 영화에 흠뻑 빠졌다. DVD로 출시된 감독의 장편 데뷔작 [미국 슬립오버의 신화 (The Myth of the American Sleepover, 2010; 데이빗 로버트 미첼)]도 봤는데 이쪽도 인물들에 대한 존중이 돋보이는, 신인감독스러운 풋풋한 영화였다. [실버 레이크 아래서 (Under the Silver Lake)]는 언제 공개되는 거야? 사실 [악마의 밤 (Night of the Demon, 1957; 자크 투르네르)]가 영화도 대단히 잘 만들었고 패키지마저 훌륭한데, 이성적인 학자 캐릭터가 일방적으로 얻어맞는 영화는 뭔가 마음 한구석이 불편하다. 


나머지는 특별한 설명 없이 리스트만 적어둔다. 내년에는 좀 더 풍성한 글이 될 수 있길.

올해의 필름 누아르: [추락한 천사 (Fallen Angel, 1945; 오토 프레민저)]

올해의 서부극: [발데스가 온다 (Valdez Is Coming, 1971; 에드윈 쉐린)]

올해의 범죄 영화: [찰리 배릭 (Charley Varrick, 1973; 돈 시겔)]

올해의 드라마: [겨울의 서늘한 정경 (Chilly Scenes of Winter, 1979; 존 미클린 실버)]

올해의 코미디: [모던 로맨스 (Modern Romance, 1981; 앨버트 브룩스)] 

올해의 트리오: [경찰이 도움을 청하다 (La polizia chiede aiuto, 1974; 마시모 달라마노)]의 마지막 도원 결의

올해의 아시아인 주연 영화: [붉은 기모노 (The Crimson Kimono, 1959; 사무엘 풀러)]

올해의 '미국' 영화: [추적 (The Chase, 1966; 아서 펜)]

올해의 이탈리아 영화: [가장 아름다운 아내 (La moglie più bella, 1970; 다미아노 다미아니)]

올해의 비스콘티: [순수한 사람들 (L'Innocente, 1976; 루키노 비스콘티)] 

그 외에 언급해두고 싶지만 딱히 어울리는 카테고리를 찾지 못한 영화들

[스탕달 신드롬 (La sindrome di Stendhal, 1996; 다리오 아르젠토)]

[야쿠자 (Yazuka, 1975; 시드니 폴락)]

[Ninth Configuration (1980; 울리엄 피터 블래티)]: 마를레네 디트리히가 아니었다면 올해의 배우는 스테이시 키치.


2019년의 첫 영화는 [인도가 끝나는 곳 (Where the Sidewalk Ends, 1950; 오토 프레민저)]였다. 출발이 무척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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