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맞아 그동안 외면해 온 (?) 부가 영상도 챙겨보고 음성 해설은 3월 이후에 장비를 제대로 갖추면 추출해서 들으려고 한다. 그런 마음을 먹고 나니 재미있게 본 타이틀에 대해 글을 써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예전의 '기획'들처럼 얼마나 지속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시도부터 해보기로 했다. 그래서 카테고리 정리를 해야함에도 불구하고 되려 카테고리를 하나 늘리고 말았다...

그 첫번째 타이틀은 미국의 Scorpion Releasing에서 출시한 [Murderock (Uccide a passo di danza, 1984; 루치오 풀치)]. Scorpion Releasing은 영어 자막 안넣어주기로 악명높던 회사 중 하나였는데, 2018년 초부터 Roninflix 쇼핑몰에서 자막을 수록한 한정판을 판매하기 시작하더니 실적이 좋았는지 최근 타이틀은 예외없이 자막을 수록하고 있는 걸로 보인다. ([오페라 (Opera, 1987; 다리오 아르젠토)] 자막수록 한정판은 언제쯤 출시할런지...?)

 

 


[Murderock]의 감독 루치오 풀치는 바바, 아르젠토와 함께 이탈리아 공포 영화의 대표 주자로 꼽히며 특유의 그로테스크한 고어 묘사로 정평이 나있는 감독이다. 아르젠토의 뒤를 이어 최근 블루레이 시대의 수혜를 톡톡히 누리고 있는데, Arrow, Mondo Macabro, Blue Underground, Severin Films, Scorpion Realising 등 여러 레이블에서 근 2년간 신작을 우후죽순처럼 출시하였으며, 그런 과정에서 고어 묘사에 중점을 두지 않은 흥미로운 작품들이 소개되면서 일종의 재발견 또한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Murderock]은 [페임 (Fame, 1980; 앨런 파커)]나 [플래시댄스 (Flashdance, 1983; 에이드리언 린)]같은 댄스 영화들이 미국에서 인기를 모으자 여기에 편승하여 댄스 아카데미를 배경으로 한 지알로 영화를 만들어 팔아먹자는 지극히 이탈리아스러운 발상에서 출발한 기획이다. 미국 댄스 영화들의 유행에 편승한 영화답게 공간적 배경도 뉴욕이고 (설득력을 부여하기 위해 몇몇 야외 장면은 뉴욕에서 촬영했다), 브로드웨이 데뷔를 목표로 하는 학원의 여학생들이 한 명씩 살해된다는 줄거리이다. 

당연히 춤 장면과 살인 장면이 궁금해지는데, 영화 오프닝의, 이후 내용과 아무 관련없는 뜬금없는 스트리트 댄스 장면을 제외하면 춤 장면은 대략 3번 정도 등장하는데, 오프닝 직후 등장하는 첫 군무와 영화 초중반에 등장하는 한 학생의 독무는 꽤 볼만했다. 후반으로 갈수록 살인 사건에 집중하면서 춤 장면은 거의 사라지지만, 댄스 아카데미라는 배경은 끝까지 야무지게 써먹어서 기대 이상으로 실속이 있다. 음악은 전설적인 키보드 연주자 키스 에머슨이 맡았는데 (키스 에머슨은 다리오 아르젠토와 인연이 있어 [인페르노 (Inferno, 1980; 다리오 아르젠토)]와 아르젠토가 제작을 맡은 [교회 (La chiesa, 1989; 미켈레 소아비)]의 음악을 담당하기도 했다), 본인이 잘하는 프로그레시브 스타일의 음악 대신에 팝음악을 사용해서 평이 좋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팝음악이 영화와는 당연히 잘 어울리고 -프로그레시브 음악으로 브로드웨이 스타일 군무를 추는 건 상상하기 어렵지 않은가- 나는 영화를 다 보고도 듣고 싶어지는 좋은 음악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의 살인 장면의 특징은 범인이 일단 피해자를 클로로포름으로 마취시킨 뒤 가슴을 열어 젖혀 손잡이가 달린 핀을 심장에 찔러 죽인다는 점인데, 사실상 여성의 가슴을 스크린에 오래도록 보여주려는 변명 거리에 가깝겠지만, 각 살인마다 변주하려는 노력도 있고 아르젠토의 전성기 영화마냥 눈이 휘둥그래지는 건 아니지만 그 시도들이 잘 먹혀 들어가, 보는 즐거움이 있었다. 

범인을 밝혀내는 트릭이 지나치게 단순하다는 느낌은 있지만, 범인의 정체나 동기가 꽤 납득이 되는 편이고 (사실 풀치의 영화들이 대체로 다른 이탈리아 공포 영화들에 비해 각본이 말이 된다는 인상을 받아서, 풀치가 그런 걸 선호하는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결말에 이르면 정서적으로 이입할 부분도 있어 나쁘지 않았다. 

영어/이탈리아어 음성과 이탈리아어 음성의 영어 자막을 제공하는데, 나는 영어 음성과 영어 자막으로 감상했다. 처음에는 이탈리아어를 선택했지만 배경도 뉴욕이고 특별히 어려운 대사도 없어서 영어 음성 쪽이 위화감이 덜하리라 판단했다. 특별히 감상에 거슬리는 점은 없었지만 영어 자막과 영어 음성이 싱크도 안맞을 때가 있고 내용도 다를 때가 많으니 거부감이 있다면 이탈리아어 음성+영어 자막 조합으로 감상하는 걸 추천한다. 

케이스와 첫번째 표지의 디자인은 영화와 제법 어울리는데, 위의 이미지 중 여성이 X자 모양의 나무에 묶여 있는 리버시블 표지의 디자인은 영화와 하등의 관계가 없다. 표지에 적혀 있는 문구를 보면 풀치의 악명(?)을 십분 활용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부록으로는 (1) 트로이 하워스의 음성 해설, (2) 배우 가레타 가레타와의 약 25분 분량의 새 인터뷰 (영어, 자막 없음), (3) (루치오 풀치의 1987년 인터뷰 음성이 포함된) 분장 담당 프랑코 카사니와의 약 15분 분량의 새 인터뷰 (이탈리아어, 노란색 자막 있음)가 수록되어 있다. (1)은 아직 들어보지 않았고, 큰 기대없이 본 (2)와 (3)에 뜻밖에 즐거운 부분도 있었다. 가레타 가레타는 이 영화에서 큰 비중 없는 조연인 안무가로 출연하는데, 로마에서 촬영한 이 영화에 출연하게 된 계기, 촬영장 풍경이나 풀치와의 에피소드들이 기대 이상으로 풍성했고, 본인이 출연한 다른 영화들에 대한 이야기는 좀 뜬금없었지만 그래도 아는 영화들이 나오면 반갑기도 하고. 프랑코 카사니의 인터뷰는 살인 장면을 연출하는 트릭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제외하면 정말 아무 정보가 없는데, 카사니 인터뷰와는 아무 상관없이 교차적으로 등장하는 풀치의 1987년 인터뷰 음성이 재밌다. '환상 영화'를 애호하는 미국 관객에 대한 (이탈리아 관객에 대비한) 고평가나 이 영화로 오랫만에 지알로로 돌아왔다면서 이전에 만든 [새끼 오리를 고문하지 마라]를 두고 어느 영화제에서 만난 크로넨버그(!)가 이탈리아 시골을 배경으로 이렇게 죄의식을 주 테마로 삼은 영화는 처음이라고 말했다는 에피소드를 자랑스러운 톤으로 언급하는데 또 생각치도 않았던 인물의 뜻밖의 등장이 반갑다. 굉장히 짤막한 인터뷰 영상들이라 큰 기대를 할 건 아니고 소소한 즐거움이 있는 정도.


리스트에 앞서 제목에서 두 가지 언급할 점: 첫째, '신작'의 기준은 Letterboxd 기준 2017, 2018년 개봉작. 2017년을 포함하는 이유는 영화제 등을 이유로 개봉만 2017년으로 표기되어 있을 뿐, 내 기준으로는 2018년 신작으로 간주해야 할 작품일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 신작을 따로 체크하는 이유는, 이렇게 하지 않을 경우 내가 리스트에 꼽을 영상물의 대부분이 (검증된) 오래된 영화들일텐데, 새로운 영화를 발굴하는 즐거움 또한 놓치고 싶지 않기 때문. 둘째, 영화가 아니라 굳이 '영상물'로 적은 이유는 리스트에 들어간 한 작품 때문. 

10. [서던 리치: 소멸의 땅 (Annihilation; 알렉스 갈란드)], 극장관람

고립된 극한의 환경에 서로 다른 방식으로 대응하며 갈등을 빚는 탐사대라는 설정은 특별할 것 없지만, 그 전원이 여성이고 (좀 CG 티도 나긴 하지만) 극한의 환경을 매혹적으로 그려내며 영화관에서 감상하면 독특한 음향까지 더해져 굉장히 신선한 체험이 된다. 바로 아래 작품도 그렇지만 왜 이런 영화가 넷플릭스를 통해 서비스가 되었는지. 탐사대 팀장이 제니퍼 제이슨 리라 가산점.

9.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 (Spider-Man: Into the Spider-Verse; Peter Ramsey, Robert Persichetti Jr., Rodney Rothman)], 극장관람

점점 더 천편일률적이고 지루해져만 가는 슈퍼 히어로 장르에서 이런 보물이 나올 줄이야. 미국 히어로 코믹스는 그 특성상 스토리 자체보다는 다양한 캐릭터 해석과 변주가 흥미로운 경우가 많은데, 그 캐릭터들을 한 자리에 모아두니 재미있는 결과물이 나왔다. 코믹스의 표현 양식을 자유롭게 사용하며 실사 영화와 다름을 온몸으로 어필하는 애니메이션은 언제나 내 취향. 

8. [로마 (Roma; 알폰소 쿠아론)], 극장관람

자의식 과잉이 아닌가 싶어 민망스러운 장면(산불나는데 노래부르는 장면이라던가)도 있긴 한데, 카메라 움직임과 Dolby Atmos 음향을 정교하게 활용하여 대단한 현장감을 부여하려는 시도들이 인상깊었다. 좋은 시설의 극장에서 보아서 그런지 그 시도들이 성공적이라 느껴졌고. 그러니까 이게 왜 넷플릭스...

7. [안나와 종말의 날 (Anna and the Apocalypse; 존 맥페일)], 극장관람

뮤지컬인데 노래 훌륭하고 안무 좋은데다가 인물들에 충분히 공감과 연민, 동정심을 느낄 수 있는 좀비 영화다. 뭘 더 바래? [새벽의 황당한 저주 (Shaun of the Dead, 에드가 라이트, 2004)] 아류작 정도로 치부하는 평들도 있던데 그 영향력이 강하게 느껴지는 장면들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뮤지컬을 좀비 영화에 잘 결합한 시점에서 이미 자기 영역을 충분히 확보하고 있는거 아닌가. 

6. [팬텀 스레드 (Phantom Thread; 폴 토마스 앤더슨)], 극장관람

비키 크립스가 여우주연상 후보에도 못 올라간 건 아카데미가 두고두고 욕먹을 일이다. 결혼 생활의 정수를 예리하게 포착하낸 아름다운 소품이라고 생각한다. 대개 보조적인 역할에 그치던 폴 토마스 앤더슨의 여성 인물(들)이 이 정도의 영향력을 작품 전체에 행사하는 일도 드물어, 다음 행보가 궁금하다. 혹시라도 여성 단독 주연 영화 같은 거 나오는 거 아냐? 

5. [99번 수감동의 싸움 (Brawl in Cell Block 99; S. 크레익 잘러)], 아마존 프라임

억누를 때와 터트릴 때를 정확히 알고 있는 장르 영화를 보는 건 끝내준다! 

4. [맨디 (Mandy; 파노스 코스마토스)], 극장관람

종잡을 데 없이 장면마다 마구마구 폭주하는 영화인데, 그 폭주의 에너지가 묘하게 한 방향으로 집중되어 산만하지 않고 대단한 흐름이 된다. 이 폭주를 소화해낼 수 있는 유일무이한(?) 배우 니콜라스 케이지에게 찬사를. 이 어처구니없는 영화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과 함께 극장에서 감상하니 정말 상쾌했다. 가히 올해 최고의 극장 경험 1호로 꼽을 만 하다. 

3. [힐 하우스의 유령 (The Haunting of Hill House; 마이크 플래나간)], 넷플릭스

나는 2시간 내외의 실사 영화를 기준점으로 두고 애니메이션이나 드라마를 볼 때 실사 영화와 차별화되는 무언가를 제공하는가를 중점적으로 보는데, [힐 하우스의 유령]은 "왜 드라마인가?"라는 물음에 충실히 답한다. 과거의 비극적이고 끔찍한 경험이 인물들의 현재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쳤는지를 사려 깊고도 모든 인물에 대한 존중을 담아 그려내는데, 한두 인물에게 이입하게 하는 영화는 적지 않지만, 모두 서로 다른 양상의 반응을 보이는 '크레인 가족' 전체에 깊이 공감할 수 있었던 건 10시간 내외의 드라마가 아니었다면 대단히 힘들었을 것이다. 그 와중에 단독으로 훌륭한 비극을 완성하는 5화나 야심차게 기술적 성취를 뽐내는 6화(대체 세트 설계나 연기 및 동선 지도-특히 아역들의-를 어떻게 한 것인지 궁금하다)는 특히 인상깊었다. 

2. [복수 (Revenge; Coralie Fargeat)], 극장관람

올해 최고의 극장 경험 2호. [맨디]와 달리 전혀 무엇을 볼지 준비되지 않은 (나 포함) 관객들 사이에서 봤는데 이건 이거대로 무척이나 유쾌했다. 장르의 틀은 유지하면서 포커스를 여성에게 맞추어 "강간"-복수극이 아니라 강간-"복수"극을 만든 아이디어도 좋고, 단순히 도식적인 전복에 그치지 않고 작품 구석구석에 이를 야무지게 활용하여 대단한 서스펜스와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는 독특한 액션 장면들을 하나도 아니고 여럿 만들어내는데 아이고 감사합니다. 

1. [제일개혁교회 (First Reformed; 폴 슈레이더)], 극장관람 

종교와 테러리즘, 이데올로기, 모순적인 열정에 대해 이토록 고통스럽고 진지하게 다루면서, 장면 하나하나의 '숭고함' 또한 대단한데, 상징주의나 형이상학으로 치닫지 않고 두 발을 현실에 단단히 붙이고 있는 걸작을 평생 여기에 천착한 폴 슈레이더 아니면 누가 만들겠냐 싶지만 그걸 '2018년의 폴 슈레이더'가 만들었다는 건 일종의 기적이 아닌가.  



일자리도 정해졌고 앞으로는 좀 더 편한 마음으로 영화를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마음의 짐(?)이었던 코멘터리도 좀 보고. (정확히는 블루레이에서 코멘터리를 추출하여 출퇴근 길에 듣는 걸 생각 중인데 아직 일을 시작하기까지는 시간이 남은 만큼 어떤 식으로 즐길 지는 차차 고려해 보려고 한다.) 

블랙 프라이데이를 맞이하여 지른 Vinegar Syndrome의 블루레이들이 도착(한지는 한참 됐지만). 무늬만 세일하는 Shout! Factory 같은 레이블과 달리 Vinegar Syndrome은 "이것이 세일이다"라며 온몸으로 외치는 듯한 가격을 선보여 도저히 안 살 수가 없다. 게다가 올해는 걸작 [리퀴드 스카이 (Liquid Sky, 1982; Slava Tsukerman)]는 물론이오, [스위트 슈거 (Sweet Sugar, 1973; 미셀 르벡)] 같은 작품도 의외의 종합 선물 세트같은 재미를 선사해준터라 Vinegar Syndrome 세일을 지나칠 수 없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Vinegar Syndrome 타이틀의 성공률이 그리 높지는 않기에 고민이 되긴 하지만, 이전부터 레이블 관계자들이 출연한 ShockWave Podcast도 들으면서 사고 싶은 타이틀을 추려뒀던 터라 구매가 어렵지는 않았다.

Vinegar Syndrome 타이틀의 성공률이 높지 않다고 해도 나에게는 각별한 기분이 드는 레이블인데, 무엇보다 "잘 만든 영화"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데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그러하다. 영화를 볼 때 주목하는 부분들이 확실히 달라졌음을 느낄 수 있다. "못 만든 영화" 중에서 어떤 영화가 흥미로운지, 어떤 영화는 지루하고 시간이 아까운지를 생각하다보면 소위 "잘 만든 영화"들 역시 이런 기준에서 보게 된달까. 이번에 구입한 일곱 영화 중에도 한 세 개쯤 건지면 나쁘지 않은 타율이라고 생각하고, 내년에는 (이제 금전적 여유도 생길터이니) 실패에 대한 두려움 없이 더 많은 타이틀을 사게 되리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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